미래로보텍 2008. 1. 28. 12:36

 


참선하는 법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이다'〔一切唯心〕라고 말합니다.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는 말입니다. 또한 卽心卽佛이라고도 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에 담겨 있는 만치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다 봐야 할 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불교는 모르고 마는 것인 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마음 '心'자 한 자에 있습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心자 한자위에 서 있어서 이 한 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불 교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일체 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고 三世諸佛을 한 눈에 다 볼수 있 는 것입니다. 自初至終이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마음의 눈을 뜨자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자기의 본성, 즉 自性을 보는데 그것을 見性 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불교에 관심이 있고 참선 좀 한다는 사람은 참선 시작한 지 한 사 나흘도 안되어 모두 견성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곳에도 견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견성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大乘起信論에 보면,

보살지가 다하여
멀리 미세망상을 떠나면
마음의 성품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을 구경각이라 한다.
菩薩地盡
遠離徵細
得見心性
名究竟覺

보살이 수행을 하여서 마침내 十地와 等覺을 넘어서서 가장 미세한 망상인 제8阿賴耶識의 根本無明까지 완전히 다 떨어져버리면 眞如가 나타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견 성이고 구경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妙覺이라고도 합니다.

또 涅槃經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상정각을 이루면
부처님 성품을 볼 수 있고,
부처님 성품을 보면
무상정각을 이룬다.
成無上正覺
得見佛性
得見佛性
成無上正覺

위 없는 바른 깨달음, 즉 성불이 바로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을 보는 것이고, 불성을 보는 견성이 바로 바른 깨달음인 성불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기신론에서 말씀하신 '구경각이 견 성'이라는 것과 내용이 꼭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열반경에서는 더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 다.

 

 

 

보살의 지위가 십지가 되어도
불성은 아직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菩薩地盡十地
尙未明了知見佛性

결국 보살의 수행단계가 十地가 되어도 견성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불해야만 견성 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견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喩伽師地論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경지보살은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究竟地菩薩
如微闇中見物

어두운 곳에서는 물건의 바른 모습을 볼 수 없듯이 십지나 등각위의 구경지보살이 불성을 보는 것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결국 일체만법의 본 모습인 자성을 보려면,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듯하는 수행단계를 지나서 밝은 햇빛 속으로 쑥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즉 구경각을 성취해서 성불하는 것이 바로 견성인 것입니다.

그럼 禪宗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선종의 스님들 중에서도 운문종의 宗祖인 雲門스님께 서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십지보살이
설법은 구름일고 비오듯 하여도
견성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과 같다.
十地菩薩
說法如雲如雨
見性如隔羅穀

십지보살은 法雲地보살이라 하여 법문을 할 때는 온 천지에 구름이 덮히고 비가 쏟아지듯 그렇게 법문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견성 즉 자성을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 린 것 같다는 말이니, 비단으로 눈을 가렸는데 어떻게 물체를 바로 볼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이 대승불교의 總論이라고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에서는 보살지가 다 끝난 구경각 을 견성이라 했고, 부처님 최후의 법문인 열반경에서는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 인데 십지보살도 견성 못했다고 하였고, 唯識宗의 所依經典인 유가사지론에서는 불성을 보 는 것은 구경지보살도 어두운 가운데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하였고, 宗門의 조사인 운문 스님은 십지보살도 견성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禪과 敎를 통해서 어느 점에서 보든 지 간에 견성이 바로 성불이며, 그것은 보살수행의 십지와 등각을 넘어서 구경각을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지는 고사하고 三賢도 아닌 단계, 비유하자면 층층대의 맨 꼭대기가 견성인데 그 첫째 계단에도 올라가지 못하고서 견성했다고, 道通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견성해서 다시 성불한다고 하니 대체 그 견성은 어떤 것인지 이것이 요새 불교 믿는 사람의 큰 病痛입니 다.

그렇다면 이 병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하면 普照스님이 지은 修心訣에서 비롯됩니다. 거기 에 頓悟漸修라 하여 자성을 깨치는 것을 돈오라 하고, 돈오한 후에 오래 익힌 習氣를 없애 는 漸修를 닦아야 한다고 하였고, 그 돈오한 위치가 보살의 수행 次第의 十信初에 들어간다 고 하였습니다.

보조스님은 중국의 圭峯스님의 사상을 이어받아서 돈오 점수를 주장했읍니다만, 규봉스님 은 십신초인 보살지를 돈오 즉 견성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또 그가 주장한 깨침이란 것은 단지 교학상의 이론을 아는 解悟를 말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돈오를 견성이라하면서 그 지위가 十信初라고 節要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려시대의 큰 스님인 보조스님께서 말씀 하셨는데 잘못 되었겠느냐'고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經이나 論에서는 분명히 삼현 십지를 넘어선 구경각을 성 취하는 것을 견성이라 하고 있으니, 결국 보조스님의 수심결이 기신론보다 낫고, 열반경보다 낫고 유가사지론보다 낫다는 말인가? 또 종문의 대표적 스님인 운문스님보다 낫다는 말인 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보조스님이 수심결에서 말씀하신 것, 十地初에서의 돈오가 견성 이라는 그 사상은 근본적으로 시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지보살이나 구경각이니 하는 그 깨달음의 경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무엇 을 표준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데 대해서 궁금증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宗門에 분명한 표준이 있습니다.

 

 

 

 

 

2

화엄경 十地品에 보면
보살지가 7지(地)가 되면 꿈속에서도 장애를 받지 않고 공부가 여여하다.

참선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고 있을 때에도 아무 장애를 받지않고 공부가 한결 같으면 7지보살이라고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7지의 보살이 설사 꿈에는 공부가 一如 하더라 해도 깊은 잠에 들면 캄캄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잠이 깊이 들어도 일여한 경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잠을 자는 것 같지만
실지는 잠을 자지 않는다.
外似現睡
實無睡也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어도 정신 상태는 항상 밝아 있어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 다. 항상 밝아 있는 정신 상태가 올 것 같으면 8지 보살 이상 즉 自在位라 합니다. 그런데 자재위에는 두 종류가 있어서 깊은 잠 즉, 숙면에서 일여하여도 아리야식의 미세한 망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8지 이상의 자재 보살이고, 그 미세망상까지 완전히 다 끊어져 없어져 버리면 그 때에는 眞如가 드러나고 그것이 견성이고 부처님입니다. 그때는 如來位라 합니다.

불교에서 수행하여 공부하는 단계를 보면, 첫째 動靜一如 즉 일상 생활에서 가고 오고 할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말을 하거나 안 하거나 변함없이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如如不變하 여야 합니다.

동정일여가 되어도 잠이 들어 꿈을 꾸면 공부는 없어지고 꿈속에서 딴 짓하며 놀고 있는 데, 꿈에서도 일여한 것을 夢中一如라 합니다.

몽중일여가 되어도 앞에서 말했듯이 잠이 깊이 들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잠이 꽉 들었을 때에도 여여한 것을 熟眠一如라 합니다.

숙면일여가 되어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百千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된다 말입니다. 그리하여 깨쳐야만 그것이 실제 견성입니다.

그런데 참선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숙면일여는 고사하고, 몽중일여도 고사하고 더구나 동정일여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견성했다, 깨쳤다고 인정해 달라고 나한테 온 사람만도 수 백명은 보았습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무엇인가가 정신을 확 덮어버립니 다. 그 때에는 자기가 깨친 것 같고 자기가 부처님보다 나은 것 같고, 조사스님보다 나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그런 병이 있습니다. 이 병에 들어놓으면 누구 말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래도 여러 가지로 설명해 주면 어떤 사람은 잘못된 줄 알고 다시 공부하고, 또 어떤 사람 은 이 병을 한동안 앓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젊은 스님 한 사람이 불교를 믿고 참선을 한다는 處士들 모임에 갔더라고 합니다. 약 백 여명 모인 처사들 중에서 90명은 견성했더라는 것입니다.

'이럴 것이 아니라 해인사 큰스님께 가서 한번 물어보시오'

'뭐, 큰스님이니 작은스님이니 물어볼 것 있습니까'

큰스님, 작은스님이 소용없다니, 그렇게 되면 부처님도 소용없습니다. 이리되면 곤란합니 다. 좀 오래전의 일입니다. 70세 남짓 된 노인이 한사람 찾아왔습니다. 그 때에도 3천배 절 하고서 내 방에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안 오려 했는데 옆의 사람 들이 하도 가 보라고 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70이나 되면서 옆의 사람이 가보라 한다고 쫓아와, 이 늙은이야, 자기 오기 싫으 면 안 오면 그만이지 대체 무슨 일로 옆에서는 그렇게 권했오?'

'내가 40여년을 참선을 하는데 벌써 20년 전에 확철히 깨쳤습니다. 그 후 여러 스님들을 찾아 다니면서 물어 봐도 별 수 없어 이젠 찾아 다니지도 않는데, 그런데 '성철스님께 가 보 라'고 하도 이야기 해서 할 수 없이 찾아 왔습니다.'

'그래 어쨌든 잘 왔오. 들어보니 노인은 참 좋은 보물을 갖고 있오. 잠깐 앉아 있는데 모 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몇 시간도 금방 지나가 버리니 그런 좋은 보물이 또 어디 있겠오. 내가 한 가지 물어 보겠는데 딱 양심대로 말하시오. 거짓말하면 죽습니다. 그 보물이 꿈에도 있습니까?'

'(눈이 둥그래지며) 꿈에는 없습니다.'

'뭐, 꿈에는 없다고? 이 늙은놈아! 꿈에도 안되는 그걸 가지고 공부라고 善知識이 있니 없 니 하고 있어? 이런 놈은 죽어야 돼. 하루에 만 명을 때려 죽여도 괜찮아, 인과도 없어.'

그리고는 실제 주장자로 두들겨 패주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맞고 있더만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더니 자기 공부가 틀린 줄 알고서 다시 새로 공부를 배우겠다는 것 입니다. 지금도 그 영감이 살아 있습니다. 80세가 넘었는데도.

이런 병폐가 실제 많이 있습니다. 꿈에도 안 되는 이것을 가지고 자기가 천하 제일인 듯 이 하고 다닙니다. 여기 이 대중 가운데에도 나한테 직접 덤빈 사람도 몇 사람 있습니다. 요 새도 보면 그 병을 못 버리고 무슨 큰 보물단지나 되는 것처럼 걸머 쥔 사람도 있습니다. 이상으로 견성이라고 하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 떤 방법에 의하면 견성을 할 수 있는가?

 

 

 

3

불교에서는 성불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灌法을 한다, 呪力을 한다, 經을 읽는다, 다라니를 외우는 등등,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참선입니다. 견성성불하는 데에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입니다.

참선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신도나 스님네들만 하는 것이 아니 고, 신부나 수녀도 백련암에 와서 3천배 절하고 화두 배워갑니다. 나한테서 화두 배우려면 누구든지 3천배 절 안하면 안 가르쳐 주니까.

며칠 전에도 예수교 믿는 사람들 셋이 와서 3천배 절하고 갔습니다. 이 사람들한테 내가 항상 말합니다.

'절을 하는데 무슨 조건으로 하느냐 하면 하나님 반대하고 예수 가장 많이 욕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라고 축원하고 절해라.'

이렇게 말하면 그들도 참 좋아합니다. 이런 것이 종교인의 자세 아닙니까.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우리 종교 안 믿는 사람은 모두 다 나 쁜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면 그는 점잖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를 욕하고 나를 해치려하면 할수록 그 사람을 더 존경하고 그 사람을 더 도우고 그 사 람을 더 좋은 자리에 앉게 하라고 부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