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리 방/<성철큰스님>

성철큰스님법어

미래로보텍 2008. 1. 30. 22:59

어떤 도적놈이
어떤 도적놈이
나의 가사 장삼을 빌려 입고
부처님을 팔아
자꾸 죄만 짓는다


머리를 깎고, 부처님의 의복 가사 장삼을 빌려 입고, 중 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모두 도적놈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승려가 되어 가사 장삼을 입고 도를 닦아 도를 깨쳐 중생을 제도 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모두 다
도적놈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이는 부처님 말씀인데, 불교 법문에 많이 인용하는 말씀 입니다. 우리가 승려가 되어 절에
살면서 부처님 말씀 그대로 살행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가까이는 가 봐야
되고, 근방에는 가봐야 하는 것 입니다.


설사는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의 정반대 방향으로는 안되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즘 보면 부처님 말씀에 가까이 가기는 고사하고 대개 반대 방향이 많습니다.
내가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


다행이 사람 몸 받아서 승려가 되어, 불법을 성취하여 중생 제도는 못 할지언정 도적놈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그 사람을 도적놈이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 사는 처소는 무엇이라 해야 할 것 입니까?


그곳은 절이 아니고 도적놈 소굴 입니다. 적굴(賊窟)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이 됩니까?
부처님은 도적놈 앞잡이지 뭡니까? 부처님이 도적놈에게 팔려 있으니 부처님이 도적놈
앞잡이 아닙니까?


그러면 다른 나라는 그만두고, 대한 민국에 절도 많고 승려도 많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놈의 딱지를 면할 수 있는 승려가 얼마나 되며, 도적놈 적굴을 면할 수 있는 절이
몇군데나 되는지, 또 도적놈 앞잡이를 면할 수 있는 부처님은 몇분이나 될는지, 참으로
의문 입니다.


우리가 승려 노릇 잘 못하고 공부를 잘 못해서 생함(生陷) 지옥을 갈지언정, 천주 만고에
우주 개벽이래 가장 거룩하다는 부처님을 도적놈 앞잡이로 만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도적놈이 되는 것은 나의 업이라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지옥으로
간다 할지라도 달게 받겠지만, 부처님까지 도적놈 앞잡이로 만들어서 어떻게 살겠느냐
이것 입니다. 어떻게 하든 우리가 노력해서 거룩하신 부처님이 도적놈 앞잡이 노릇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파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불공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부처님을 파는 행위 입니다. 


"우리 부처님 영험하여 명(命)도 주고, 복도 주고, 그러니 우리 부처님께 와서 불공하여
명도 받고 복도 받아가라."


그리고 승려는 목탁을 칩니다. 목탁이란 본시 법을 전하는 것이 근본 생명입니다. 이는
유교에도 있는 말인데, 공자는 자기 제자들에게 " 세상의 목탁이 되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바른 법을 전하여 세상 사람이 모두 바로 살게 하라는 말 입니다.  목탁이란
바른 법을 전하여 세상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그 근본 사명인데, 그 목탁을
두드려 부처님 앞에서 명 빌고 복 빌고 하여 돈 벌이 하는데 이요하게 되면 이것은
곤란한 일 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실정에서 목탁이 돈 벌이에 이용 안되는 절은 별로 없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목탁 치면서 명 빌고 복 빌고 하는 것-- 그것은 장사 입니다. 장사! 부처님을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허물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허물이 있는 것을 반성하여
고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입니다. 허물 있는 줄 알면서도 반성하여 못 고치면 그것은
생함(生陷) 지옥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참다운 불공이 되는 것인가?


내가 전부터 자주 불공 이야기를 해 오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교에서는 바이블 한 권이면 되지만, 불교에서는 팔만대장경이라 하여 듣기만
하여도 엄청나지요. 장경각에 가 보십시오. 그 많은 경판은 쳐다 보기만 해도 겁이 날
것 입니다.


언제 그 많은 것을 보아 불교의 근본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인지 호호망망(浩浩茫茫)
합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는 전통적으로 정설이 있습니다. 경(經)중에서도 어떤 경,
어떤 부처님 말씀이 근본적이고 가장 소중하느냐 할때 [화엄경],[법화경]이 경중왕
(經中王)이요, 불교의 표준 입니다.


그 중에서도 [화엄경]이 [법화경]보다 진리면에서 더 깊고 더 넓다 하는 것이 불교의
정설 입니다. 그러나 [화엄경]도 보편적으로 80권인데 어떻게 다 보겠습니까.
더욱이 어려운 한문 입니다. 다행히도 [화엄경]을 요약한 경이 또 한권 있습니다.
[보현보살 행원품]이란 것 입니다.


[약(略) 화엄경]이라고 하는 것인데, 요새 말로 하면 화엄경의 엑기스 입니다.
[보현보살행원품]에 불교의 근본 진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불교인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 모두 규정되어 있습니다. 간단하면서도 세세하게!


거기에 불고에 관한 말씀도 있습니다. 보현보살 십대원(十大願)의 그 광수공양편 편에!
물론 다 알겠지만 거기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심을 내어 온 천하의 좋은 물건을 허공계에 가득 차도록 다 모으고,
또 여러 촛등을 켜되 그 촛불 심지는 수미산 같고 기름은 큰 바닷물 같이 하여 두고서
수많은 미진수 불(佛)에게 한없이 절을 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불공중에서도 가장 큰 불공으로 그 공덕 또한 많지 않겠습니까? 공덕도 많겠지요.
그러나 그것보다도 법공양이란 것이 있습니다. 법공양은 일곱가지가 있는데, 근본
골자는 어디 있느냐 하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물자를 갖다 놓고 예불하고 공을 드린다고 해도 잠깐동안 중생을 도와
주는 것이, 중생에게 이익되게 하는 것이, 재물을 차려 놓고 공양하는 것 보다
몇 천만배 더 낫다."


예컨대 장사를 할 때 밑천 많이 들여서 이익 적은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밑천 적게
들여 이익 많은 장사를 할 것인가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살 먹은 어린애라도 밑천
적게 들이고 이익 많은 장사를 하려고 하지, 밑천 많이 들이고 이익 적은 장사를
하려고 안할 것입니다.


그렇듯이 부처님께 많은 물자를 올려 놓고 불공을 하는 것이 비용이 많이 드는
공양이라면, 이익 중생 공양 즉 중생을 잠깐 동안이라도 도와주는 것은 크게 힘이
안 들므로 밑천 적게 드는 공양이라는 말 입니다.


그런데 결국의 이익은 어떻게 되느냐 할 때, 부처님께 비용 많이 들여서 하는
불공은 중생을 잠깐 도와 주는 그 불공에 비교할 것이 같으면 천분의 일, 만분의 일,
억만 부의 일 - 비유도 할 수 없을 만큼 보잘 것 없는 것 입니다.


부처님은 "누구든지 나에게 돈 갖다 놓고 명 빌고, 복 빌고 하지 말고 너희가 참으로
나를 믿고 다른다고 하면 내 가르침을 실천 하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중생을 도와
주라 이 말입니다. 이것은 행원품의 다른 곳에서도 많이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렇게도 말씀 하셨습니다.


"길 가에 병들어 거의 죽어가는 강아지가 배가 고파 낑낑댈 때, 조그마한 식은 밥
덩어리 하나를 그 강아지에게 주는 것이 부처님께 진수 성찬을 차려 놓고 무수
백천만 배 절을 하는 것보다 훨신 더 공이 크다."


이러한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적어도 인격을
갖춘 사라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도 "내 앞에 돈 갖다 놔라,
복 주마. 내 앞에 돈 갖다 놓아라, 명 주마." 하는 소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도적놈 아니겠습니까?


보통 사람이라도 이런 소리를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천추 만고에 우주 개벽이래
가장 인격자이신 분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또 할 수도 없는 것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이것이 참으로 불공이요, 이것을 행해야만
참으로 내 제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즈음 학생들에게 불공하라고 자주 이야기하며 권하고 있는데,학생들은 혹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용돈을 타 쓰고 있는데 어떻게 불공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당연히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불공이란 꼭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정신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 주는 것은 모두 불공 입니다.


예를 들어, 버스 안에서 노인이나 어린이에게, 혹은 병든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 그것도 불공 입니다. 또 정신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혹은
어떤 사람을 좋은 길로 인도해 주는 것, 그것도 불공 입니다. 길거리에 앉아서
적선을 비는 눈 먼 사람에게 10원짜리 한 푼 주는것. 그것도 불공 입니다.


이처럼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남을 도와 주는 것은 모두
불공 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몸으로 마음으로 물질로- 세가지로써 불공을 하려고 하면
불공할 것이 꽉 찼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불공거리, 불공 대상 입니다.!
단지 우리가 게을러서, 게으른 병 때문에 못할 뿐입니다. 이렇게 불공 하여야만 결국에
가서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수련 대회 때, 3천배 하고 백련암에 올라와서 화두 배워 달라고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자, 모두 화두 배우기 전에 불공하는 방법 배워 불공부터 시작한 후, 화두 배우자."
이렇게 말하면 처음에 모두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우린 돈도 없는 부처님 앞에 돈
놓고 절 하라는 이야기인가 하고. 그런데 나중에 알맹이를 듣고 보면 그것이 아니고
남 도와 주는 것이 참 불공이라는 애기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끝에 가서 "모두
불공 합시다." 하면 "예." 하고 대답 하는데 진정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별한 주의를 시킵니다. 그것은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착한 일이지만 자랑하는 것은 나쁜 일 입니다. 몸으로써, 마음으로써,
물질로써 좋은 불공 해 놓고 입으로 자랑하면 모두 부수어 버리는 것 입니다.


자랑하기 위해, 자기 선전하기 위해 불공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 푼이나
기부해 놓고 신문에 크게 선전해 달라고 하며, 또 그 재미로 돈 쓰는 사람도 많은가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공이 아닙니다. 남 도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할
재료 장만하는 것이지!


참 불공이란 남을 아무리 많이 도와 주었다고 해도 절대로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말 안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근본 조건이 어디 있느냐 하면 ' 남 모르게 남
도와 주라' 이것입니다.
"남 모르게 남을 도울 것!"
예수도 이런말을 했습니다.
"왼 손이 하는 일을 바른 손이 모르게 하라."


기막힌 소리 아닙니까! 자기 왼 손으로 남을 도우면서 자기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 학생들에게 이 말이 좋게
들리는가 봅니다. 편지 자주 오니다.
"스님 말씀하신 남 모르게 남 돕자는 그 말씀을 평생 지키고 노력 하겠습니다."


내가 인용하는 예가 하나 있습니다.
6.25사변 이후 마산 근방 성주사라는 절에 가서 서너 달 머물렀습니다. 처음 가보니
법당 위에 큰 간판이 붙었는데 '법당 중창 시주 윤00' 라고 굉장히 크게 써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마산에 '윤약국'이라고 있는데 그사람 신심이
있어 법당을 모두 중수 했다는 것 입니다. 다른 말은 안하고 "그 사람 언제 여기
오는가?" 물으니 "스님께서 오신 줄 알면 내일이라도 인사하러 올 것 입니다." 하고
대답 했습니다. 그 이튿날 과연 왔습니다. 인사를 하길래 말 했습니다.


"소문을 들으니 당신 퍽 신심 있다고 다 칭찬하던데, 나는 처음이라 잘 모르지만
여기 와서 보니 당신 신심 있는줄 알겠어. 법당 위에 보니 돈을 많이 내서 중창 했다고
그 표가 얹혀 있는데 그것으로 당신 신심 있다는 것 증명 되는 것 아니겠어."


처음에는 칭찬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생각에 무척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중에 무슨 소리가 나올줄 모르고.
"그런데 간판 붙이는 위치가 잘못된 것 같애."
"왜 그렇습니까?"
"간판이란 남 많이 보기 위해 한 것인데, 이 산 중에 붙여 두어야 몇 사람이나 와서
보겠어? 그러니 저 간판 떼어서 마산 역 앞 광장에 갖다 세우자고, 그러면 몇천만명이
보고서, '마산 윤00 라는 사람이 법당을 고쳤어'하고 칭찬해 줄 것 아닌가. 이 산중에
붙여 두고 구구하게 이럴 것 무엇 있어. 내일이라도 당장 옮기자고."
"아이고 스님,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겠어? 알겠느냐 말이다. 당신이 참으로 신심에서 돈 냈어? 저 간판
얻으러 돈 낸 것 아니야?"


이것이 사실 입니다. 어떤 절에서는 시주를 할 때 미리 조건을 냅니다. 비석을 세워
달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비석을 먼저 세워 줍니다. 그러면 돈을 내지 않고 비만 떼어
먹어 버립니다. 실제로 그런 것을 내가 보았습니다.


"간판 내걸어 자랑하려는 것 아닌가? 그게 무슨 신심이야. 꼭 그런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저 간판 떼어서 마산역으로 싣고 가자구."
"잘못 되었습니다. 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몰라서 그랬다구? 몰라서 그런 것이야 허물 있나, 고치면 되지. 그럼 이왕 잘못된
것을 어떻게 해야지?"
그랬더니 자기 손으로 그 간판을 떼어 내려 탕탕 부수어 부엌에 넣어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남 모르게 도운다는 이 불공을 비밀히 시작한 지가 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불공
하라고 시켰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하고 단체로도 하라고 의무적으로 시켰습니다. 만약
내 시키는대로 불공 할 수 없는 사람은 내게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불공하는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면 이렇게
질문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스님은 불공 안 하시면서 어째 우리만 불공하라고 하십니까?"
"나도 지금 불공하고 있지 않은가. 불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이것도 불고 아닌가."


비밀히 불공하라는 것을 예를 들어 말했더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비밀히 하라고 하시면서 스님은 그것을 자랑하는 것 아닙니까?"
"허허, 그것 참 좋은 의견인데, 허나 자랑하는 것이라고볼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이렇게 한다는 말이고 그 뜻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불공의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20년 전에만 해도 서울이나 부산 등 도시 변두리에는 못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요새는 좀 살기가 나아졌지만, 그런 동네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고 싶은데
어떤 방법으로 하면 소문이 안 나게 할 수 있는지 어느 사람이 나한테 물어 왔습니다.


"우선 두어 사람이 그 동네에 가서 실태 조사를 해, 배고픈 사람을 조사하여 명단을
만든단 말이야. 또 다른 몇 사람이 그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쌀집에서 쌀을 사서
쌀표를 만들거든. 쌀 지고 다니다간 소문 다 나 버려. 한 말이든 두 말이든 표시해서
그 쌀표만 가져가면 쌀을 주도록 그렇게 준비해 놓지. 또 다른 사람이 명단을 가져
가서 그 쌀표를 나누어 주거든. 그러면 사람이 자꾸 바뀌니 어떤 사람이 쌀표를
나누어 주는지 모르지. 또 누가 물어도, '우리는 심부름 하는 사람이다'라고 하면
되니까."


처음에는 쌀표를 주면서 쌀집에 가라고 하니 잘 안 믿으려 하더랍니다. 쌀집이 별로
멀지 않으니 한번 가 보기나 하라고 자꾸 권했다는 것 입니다. 가보니 과연 쌀을
주거든요. 그 후 어린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말하더라고 합니다.
"요새 우리 동네에 이상한 일이 생겼어. 어디서 온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 그
사람들이 쌀표를 주어서 신나게 먹었어. 그런데 누군지 알 수 있어야지. 아마 그
사람들은 하늘에 내려온 부처님인가 봐."


또 한번은 추석이 되어서 마산의 어느 신도가 쌀을 트럭으로 싣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원주인은 쏙 빠져 버렸지요. 그런데 그만 발목이 잡혀
버렸습니다. 신문 기자들이 어떻게 어떻게 하여 찾아 신문에 냈습니다. 그후
그 사람이 내게 왔습니다. 그래서 말 했습니다.


"요새 불공 잘 하던데. 신문에 굉장하던데. 불공을 남 모르게 하라고 했지. 신문에
내라고 하던가. 당신 불공했어? 신문에 낼 자료 장만 했지. 다시는 오지 마라."
"원래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 기자들이 어떻게 알아서 신문에 냈어?"
"기자들, 말도 마십시요. 비밀히 해도, 그 사람들 호기심에서 이리 파고 저리 파고
결국에는 알아 버렸습니다. 결국에 기자들이 알아 버렸으니 방법이 잘못되었지만,
결코 신문에 낼 생각하고 한 것은 아닙니다."
"글쎄, 아무리 기자가 와서 파도 발목 잡히지 않도록 불공해야 된다 이말이야."


어느 동네에 부자 노인이 있어 불공을 잘 하므로 이웃에 사는 청년이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어른신 참 거룩하십니다. 재산 많은 것도 복인데 남을 잘 도와 주시니 그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노인, 눈을 부릅뜨며)이 고약한 놈! 내가 언제 남을 도왔어? 남을 돕는 것은
귀울림과 같은 거야. 자기 귀 우는 것을 남이 알 수 있어? 네가 알았는데 좋은 일은
좋은 일이야. 그런 소리 하려거든 다시는 오지 말아."


이것이 실지로 불공하는 정신 입니다. 한 쪽으로 보면 남 돕기 어렵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남 돕기는 쉬운데 소문 안 내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 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꾸 예를 들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랑은 여자들이 더 많이 합니다. 여자는 사실 입이 좀 가볍습니다. 남자
보다는 여자는 본시 몸도 좀 약하고 또 마음도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님은
어째서 여자를 약하고 모자란다고 말씀하십니까?" 하는데 생각해 봅시다.


힘따라 짐을 져야지, 안 그렇습니까? 키따라 옷을 해 입혀야지요. 키 큰 사람은
옷을 크게 입히고 키 작은 사람은 옷을 짧게 입히는 것입니다. 그게 평등 입니다.
그렇듯이 약한 사람에겐 약한 걸 말해서 힘을 내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자랑 안하게 더 주의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것 입니다.


이제 예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미국의 보이스라는 사람이 영국 런던에 가서 어느 집을 찾는데 안개가 꽉 끼어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이곳 저곳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열 두어살 되는
소년이 나타나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누굴 찾습니까?"
"어느 집을 찾는데 못 찾았어."
"저는 이 동네에 사는데 혹시 제가 아는지 주소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신사는 주소를 주었습니다.
"이 집은 마침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요."
어린이가 인도하여 안내해 준 집에 도착하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하도 고마워서 돈을 주었더니 그 소년은 사양하고 결코 받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 했습니다.


"제게는 선생님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소년단원 회원인데 우리 회원은 하루에
한가지씩 남을 도와 주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을 도와 드릴 수 있었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 드려야 됩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서 소년은 달아 나 버렸습니다.


신사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에 와 보니 어린이도 남을 돕는 정신이 가득하여 돈도 받지 않고,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고 남을 도우면서 오히려 일과를 할 수있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하니
이런 정신을 배워야 겠다."


그래서 미국에 돌아가 미국에서도 소년단을 시작 했는데, 온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보급되엇 지금은 우리 나라도 소년단(boy scout)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
소년을 찾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름 모르는 소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 그 마을에 큰 들소 동상을
세워주고 그 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겼습니다.


"날마다 꼭 착한 일을 함으로써 소년단이라는 것을 미국에 알려 준 이름 모르는
소년에게 이 동상을 바치노라."


간디 자서전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영국에 유학가서 예수교를 배웠는데 예수교에서 사람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그 후
불교에서는 진리에 눈을 떠 일체 생명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그 사람 말이 남의 종교를 말하는 것은 안되었지만, 비유하자면 예수교는
접시물이라면 불교는 바다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사람만이 상대가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상대 입니다. 물에 떠내려 가는 개미 하나 건지는 것도 불공이고, 변소에
빠진 파리 새끼 한 마리 건져 주는 것도 불공 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미물이고 할 것 없이 일체 중생 모두다 불공 대상
입니다. 사람에 한정 한다면 너무 범위가 좁지 않습니까? 사람을 돕는 것만이 불공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을 돕는 것이 불공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고 또
행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놈 소리를 면할지
모르겠습니다.


6.25 사변 전 문경 봉암사에 좀 살았는데, 지금은 죽은 향곡 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산 신도들 신심이 많은데 법문 한번 해줘."
"내 말 들을까?"
"듣든 안 듣든 법문이나 한번 해줘. 내가 사람들을 모을테니."


가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공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불공이란
남을 도와주는 것이지 절에서 목탁 두드리는 것이 불공이 아니라고, 결국 절이란
불공하는 곳이 아니고 불공 가르치는 곳이라고. 불공은 밖에 나가서 해야 되는 것이라고.
남을 돕는 것이 불공이니까. 그리고 [행원품] 이야기도 많이 해 주었습니다. 듣고
기뻐하는 사람도 많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봉암사로 돌아 왔습니다.


며칠 후 부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큰일 났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각 도마다
종무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경남 종무원에서 긴급 회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성철인가 뭔가 하는 놈이 '절에서 하는 것은 불공이 아니고, 절은 불공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다.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이다.' 라고 말하니 이것은 절에 돈
갖다 주지 말라는 것이 되는데, 그러면 우리 중들은 모두 굶어 죽게 될 터이니 저놈을
없애든 죽이든 미국으로 쫓아 버리든 해야 된다 하며 야단들이 났으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하는 것 입니다.


조금 있으니 서울에서도 누가 내려 왔습니다. 서울의 총무원에서도 회의를 했다고 하며
또 그런 소리를 하는 것 입니다. 내가 그런 소리 한 것이 영향이 좀 있다고 보았던가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말할까? 당신들 뜻대로 하자면 부처님 영험하고 도력 있으니 누구든지
돈 많이 갖다 놓으면 많이 놓을수록 복이 많이 온다고, 절에 돈벌이 많이 되도록,
그렇게 자꾸 선전할까? 그러면 나를 금방석에 올려 앉혀 줄 것인가?"
대꾸를 못하더군요.


"당신도 천년 만년 살것 같아? 언제 죽어도 죽는 건 같애. 꼭 한번 생각해 보라구.
세상 사람들은 탁주 한잔 먹고도 싸움하여 죽는 사례가 흔하지 않은가? 부처님
말씀 전하다 설사 맞아 죽는다고 한들 원통할 것이 무엇 있는가? 그런 영광이 어디
있어! 천하의 어떤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해도 나는 부처님 말씀 그대로 전하지, 절대로
부처님 말씀을 어기고 단 소리는 할 수 없으니 그런 걱정하지 말고 당신이나 잘 하시오!"


우리 대중 가운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방장 스님은 법문 해 달라고 했더니 결국 우리 먹고 살지도 못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절에 불공 안 하면 우리는 뭘 먹고 살라는 말인고?"
걱정 좀 되지요?


암자 승려들이 더 걱정될 것 입니다. 큰 절이야 매표소 수입도 있고 추수 받는 것도
있어서 걱정 없지만, 큰 절이야 땅 짚고 헤엄치기지만, 암자에셔는 순전히 불공해서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나도 걱정이 조금 됩니다. 백련암에 불지르러 올까 싶어서... 이것은 우스개로 하는
소리고, 물론 우리 해인사 대중뿐 아니고 다른 곳에서도 이런 생각들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를 믿든지 예수교를 믿든지 자기의 신념대로
하는데, 예수교를 믿으려면 예수를 믿어야지, 신부.목사를 믿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람들 믿다가는 천당이 무엇입니까, 지옥 입니다, 지옥.
그러면 불교는?
불교를 믿는다면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지 승려 따라가다가는 거구로 간다는 말 입니다.
극락이 무엇입니까, 지옥이지요!


아무쪼록 예수교를 믿으면 예수 말씀이 표준이 되어야 하고, 불교를 믿으면 부처님
말씀이 표준이 되어야 하는 것 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중간에서 소개하는 것이지, 내 말이라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달을 가리키면 저
달을 보아야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대중도 다 알겠지만,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은 불공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 대상은 절 밖에 있습니다. 불공 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불공 대상 입니다. 이것이 불공 방향이란 말 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목탁치고 부처님 앞에서 신도들 명과
복 빌어 주는 이것이 불공이 아니고, 남을 도와 주는 것이 참 불공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이것을 참으로 실천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 불교의 새 싹이
트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리적으로 볼 때, 남의 종교를 비판할 것은 아니지만, 예수교와 불교는 상대가
안됩니다. 그것은 양심있는 학자는 모두다 말하는 것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볼 때,
예수교에서 보면 불교가 아무것도 아니고 불교에서 보면 예수교가 별 것 아닐
것 입니다. 그러나 제 3자가 참으로 양심적인 면에서 말할 때 예수교와 불교는 서로
상대가 안 됩니다.


서양의 유명한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은 어떻게 평했느냐 하면 "예수교와 불교가
싸움을 한다고 가정하면 예수교가 불교를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두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요, 절벽을 향해 총알을 발사하는 것과 같다."고 극단적으로 말했습니다.
아니, 극단이 아니고 사실 입니다.

 
진리로 보면 그러한데, 그러나 실천 면에서 보면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교 사람은
참으로 종교인 활동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예수교 사람 못 따라 갑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 입니다. 자기 욕심만
차리는데 무슨 자비가 있겠는가? 참으로 자비심을 가지고 중 노릇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남 돕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비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사회에 봉사하는 것 입니다. 아마 승려가 봉사 정신이
가장 약할 것입니다. 사회에 봉사하는 정신이 승려에겐 없다고 본단 말입니다. 예수교
사람들 보면 참으로 봉사활동 많이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갈멜 수도원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정월 초 하룻날 모여서 무슨 제비를 뽑는다고
하니다. 무슨 제비인지 아십니까? 그 속에는 양로원, 고아원, 교도소 등 어려움을
겪는 각계 각층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양로원 제비를 뽑으면 1년
365일 자나 깨나 양로원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도 대상 분담
제비인 것입니다.


고아원에 해당하면 내내 고아원, 교도소에 해다하면 내내 교도소 사람을 위해 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기도로써 이루어지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 안 합니다. 조금도 안 합니다. 1년 내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남을 위한 기도의 근본 정신 입니다. 이것이 종교인 것입니다.
아무리 남의 종교이지만 잘 하는 것은 본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먹고 사는 것은
양계와 과자를 만들어 내 팔아서 먹고 산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자기들 노력해서 먹고, 기도는 전부 남을 위해 하고! 그런데
불교에서는? 불교에서도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데, 소승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 입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대승은 남만 위해 사는 것입니다. 자기야 죽든 말든.


우리 불교의 근본은 대승이지 소승이 아닙니다. 원리는 이러한데 실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쪽 사람들은 내 밥 먹고 남만 위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이것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아마 99%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내 계산이
틀렸는지 모르지만.


우리 불교하는 사람은, 더구나 승려들은 봉사 정신이 없지 않느냐 이렇게 봅니다.
예수교를 본 받아서가 아니고, 불교는 자비가 근본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 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남을 돕는데에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얼마 전 학생들이 절을 한 후 백련암에 올라 왔을 때 앞에 앉은 여학생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너는 무슨 생각으로 절 했나?"
"스님, 저는 저를 위해 절하지 않습니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절
합니다."
"그래, 너는 어째서 뺑뺑 두르기만 하지? 바로는 못 가나?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직접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 주십시요.' 하면
어때. 이렇게 하면 절하는 이 자체가 바로 남을 돕는 것 아니겠어? 모든 중생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거와는 다르지.


절은 한번 해도 남을 위해서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하고 원을
세우고 절을 하는 것 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절을 하지 말고, 절하는 것부터가
남을 위해 해야 된단 말 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으로 기도를 해야 됩니다. 어느 정도 인격이 있는 사람이면 '내 복만을 위해,
내 배만을 위해서' 기도는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기도
할 수있는 것 아닙니까.


내게 항상 다니는 사람에게는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108배 절을 하라."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그런 생활을 하려면 날마다 아침에 20분 동안
108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 108배 기도하는 정성이 없으면, 아무리 불공
한다고 해도 그것은 많이 다릅니다.


나는 새벽으로 꼭 108배 합니다. 그 목적이 어디 있는가? 시작할 때 조건이 나를
위해 절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나며... 구함 아니요
...모든 중생이 함께 같이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이제 발심하여 108배를 하는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를 위해 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다 성불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중생들과 보리도에 회향 합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남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 했으므로 기도한 공덕이 많습니다. 이것이
모두 일체 중생에게 가 버려라 이것 입니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원하노니 수승하온 이 공덕으로
위 없는 전법계에 회향 하오며


예불 참회한 이 공덕이 모두 남에게로 다 가라는 말 입니다. 그래도 혹 남은 것이
있어서 나한테로 올까봐, 온갖 것이 무상 전법계로, 온 법계로 돌아가고 나한테는
오지 말라는 말 입니다.


이것이 저 인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중국을 거쳐 신라, 고려에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중국도 중공 적화 이전에는 총림에서만이 아니고, 모든 절에서 다 '참회'해 온
것 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모두 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법계에 회향하고, 모두
남에게 다 가버려라 한 것 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 믿는 사람의 근본 자세이고,
사명이며, 본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스님도 답답 하시네. 내가 배가 고파 죽겠는데 자꾸 남의 입에만 밥을 떠 넣으라
하니 나는 굶어 죽고?"


인과법칙이란 불교뿐 아니고 우주의 근본 원리 입니다. 인과 법칙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이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 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과보가 오는 것입니다.


병이 난다든지, 생활이 가난하여 어렵다든지 하는 것이 악한 과보 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악의 원인이 있는 것 입니다. 물론 지금 그것이 기억 안 날 것입니다.
세세생생을 내려오며 지은 온갖 악한 일들이 다 기억 나겠습니까? 그러나 기억 안
난다고 해도 그 과보의 원인이 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남을
해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인 선과란, 이번에는 착한 일을 자꾸 행합니다. 그려면 좋은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선이냐? 남을 돕는 것입니다. 남을 자꾸 도우면, 남을 위해 자꾸 기도하면
결국에 그 선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도로 자기에게 모두 돌아 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것이 되고, 남을 해치면 결국에는
나를 해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면 도운 그만큼 내가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또 내게 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면 남을 내가 도우니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또 인과 법칙에 의해 그 행복이 내게로 전부 다 오는
것입니다.


생물 생태학에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해치면 자기가 먼저 손해를
본다고. 농사를 지어도 그렇습니다. 곡식이 밉다고 곡식을 헤쳐 보십시요. 누가
먼저 배고픈가. 자기부터 배고프지. 남을  도우면 남이 행복한 동시에 나도 배부르고,
남을 해치면 남이 배고픈 동시에 나도 배고픈 것 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배고파 굶어
죽을까 걱정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 같이 불공을 잘 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공할 줄 모르고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문 앞에 서서 보니 지옥 속에서 고통받는 중생들 모습이
하도 고통스럽게 보여서 도저히 눈 뜨고 못 보겠거든요.


보통 같으면 '아이구 무서워라'. 나도 저 속에 들어가면 저렇게 될텐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 어떻게 하여 도망갈까' 이런 생각이 먼저 날텐데 이 사람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는 많은 사람의 고통을 잠깐 동안이라도 나 혼자 대신 받고 저 사람들을
쉬게 해 줄수는 없을까? 편하게 해 줄 수는 없을까? 하는 착한 생각이 들었던
것 입니다. 이생각을 하고 보니 지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에 천상에 와
있었습니다. 중생을 대신해서 지옥고를 받으려고 하는 생각을 하니 지옥은 없어지고
자기부터 천당에 먼저 가 버렸단 말 입니다.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입니다. 착한 생각을 하면 자기부터 먼저 천상에
가 버린다 말입니다.


요즈음 사회에서도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 스님들은 산중에 살면서 이런
활동에는 많이 뒤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오직 부탁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 말씀에 따르는
불공을 해 보자 이것 입니다. 그리하여, 조석으로 부처님께 예불하는데 꼭 한가지
축원이 있습니다. 간단 합니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세번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해보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참으로 좋은 것이 있습니다.


절을 한번 하든, 두번 하든 일체 중생을 위해 절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기도하고
일체 중생을 돕는 사람, 일체 중생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맨 처음에 말한
부처님을 팔아서 사는 도적놈 속에 안들어간단 말입니다. 도적놈은 면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서로서로 힘써 불공을 잘해서 도적놈 속에 안 들도록 노력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