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법인에대하여
삼 법 인
법인(法印, dharma mudra)이란 법의 도장, 징표 즉 진리가 되는 도장,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불교의 특징이라는 의미이다.
삼법인(三法印)은 불교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불교를 다른 종교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이 된다.
삼법인(三法印)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형식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개념 속에 고(苦)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체개고(一切皆苦)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형식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행(諸行, sava-samskara)이란 일체의 만들어진 것, 다시 말하면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무상(無常)은 anita 를 번역한 말로써 항상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모든 존재는 항상함이 없이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바뀌고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산이나 바위 같은 것은 외견상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것일 뿐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존재란 여러 요소들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모여있는 집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와 조건들이 변하거나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도 무상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제법(諸法, sarva-dharma)은 모든 존재를 의미하고, 무아(無我)라는 말은 아(我)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我)란 생멸변화를 벗어난 영원하고 불변적인 존재인 실체 또는 본체를 말한다. 즉 우파니샤드에서 설하는 아트만(atman)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에는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아(我)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모든 존재는 비실체적인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고정불변한 실체적인 아(我)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해서 현상적인 존재, 즉 행위의 주체인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정하고 있는 것은 단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아(我)뿐이다.
무아(無我)이론의 특징은 모든 것에는 고정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고정성이 없는 것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도 한다. 자성(自性)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독립된 형이상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정불변한 형이상학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근본불교의 기본적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무아(無我)임을 꿰뚫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근본불교에서는 고정불변한 존재로서 아(我) 대신에 존재라는 것의 전체로서 오온(五蘊)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온(五蘊) 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각 요소들은 모두 비실체적인 것이므로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 역시 비실체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정불변하며 초월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브라흐만과 같은 초월적이고 비실재하는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열반(涅槃, nirvana)이라고 하는 것은 ‘불어서 끄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탐욕, 분노, 어리석음 등 번뇌의 불을 끈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열반을 “탐욕의 사라짐, 분노의 사라짐, 어리석음의 사라짐,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당시의 열반설에서는 색계정(色界定)이나 무색계정(無色界定) 등의 여러 가지 선정(禪定)의 상태를 이상적인 열반이라고 간주하거나 또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욕락(欲樂)에 빠지는 세속적인 쾌락이 열반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었던 듯하다. 붓다가 수행할 때 가르침을 받은 두 선인(仙人)은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定)이라고 하는 뛰어난 무색계정(無色界定)이 열반의 이상이라고 하였는데 붓다는 그들과 동일한 선정(禪定)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뛰어난 무색계정도 실제로는 이상적인 열반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여기고 이 두 스승으로부터 떠났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6년간의 고행 후에 열반은 신체를 혹사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고행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이 고행도 포기하였다. 그리고 고행이나 욕락과 같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 중용적인 생활과 심신상태 아래에서 세계 인생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불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열반은 단순한 고행이나 선정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와 인생의 진리에 관한 올바른 지혜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반의 상태는 고요하고 괴로움이 없이 편안한 것으로, 이를 적정(寂靜)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경전에서 열반이란 말을 멸(滅), 적(寂), 불사(不死), 최상의 안락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최상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이상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이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