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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선 이뭐꼬

미래로보텍 2008. 1. 27. 16:10

 

 

 화두선 이무꼬

(참고: 구구절절 말이 많기에 이뭣고?와 조주무자를 합쳐 이무고?라 한다.)

화두선 이무고? 를 참구 하는 이 들은 많아도 그에 따른 지침과 요약이 없어, 더불어 나눌 요약서는 흔치 않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과, 힘써 화두 참구를 하고자 하는 이 들에게 지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 입니다. 옛사람에게 누 가 안되기를 소원합니다.

[ 주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을 이른바 주시`라 합니다.
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디에서부터 좇아 왔으며, 어디로 귀결되어 가는가를, 생각으로서 생각을 주시함으로 파악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살아왔던 길을 되돌아보고 반성도 하며, 수정하고, 계획해 보기도 합니다.
내 마음이란, 습의 된 수만 가지 생각들이 서로 연관되어지며 다투는, 하나의 마치 전쟁터와도 같습니다.
기실, 본래 자리에서 본다면 허허 탕탕도 하여 한치의 벌어짐도 없는 완전한 자리라서 더 이상 무엇을 더 보태고 덜할 것이 있겠습니까.

범부 스스로 완벽하여 본래 깨달음이 필요가 없으며, 부처 스스로 모자라서 서로 마주 보아도 아는 것이 없어, 오는 것이 진리 아님이 없고, 가는 것이 도`아님이 없지만, 그러나 이것은 선'이 아니며, 깨달았다 못 깨달았다의 차이가 한 생각에 깃든 걸, 알음알이 때문에 판단해 낼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부터 화두선`이라는 당위성이 성립되어지지만 이렇게 알고서 따라오는 이 는 매우 드물고, 믿음으로 따라가는 이 또한 소수에 그쳐, 화두선`이란 어렵다거나 방편지 라는 오해가 파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주시`는 이무고? 참구법하고 유사해 보이지만 의심도 없고, 집중력이 미약하여, 습관에 떨어지기가 쉬운 이유이기도 하며, 구심점이 없어 깨달음이 오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무고? 참구`를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주시력이 형성되어 있어야 하기에 생각주시를 권하는 까닭입니다만, 어느 정도 일체시에 자신의 상태를 주시하여 파악 할 수 만 있다면 당장에 이무고? 참구법으로 가야 바른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화두...]
화두'라는 뜻은 한문그대로 말머리`라 할 수 있으며, 발명된 마음머리, 깨달음 즉, 근본자리를 뜻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무고?참구를 바르게 하면 저절로 화두상태가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무고?가 화두가 아니라, 이무고?를 참구하는 상태가 화두인 것이지요. 이른바 조고각하, 반문자성, 회광반조입니다.
이에 반대되는 말로써 화미`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말꼬리, 흩어진 마음주변 즉, 무명업장의 상태를 뜻한다 할 수 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는 업식망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이라는 것은 생각의 총체적 형태를 일컬음인데, 이 생각이라는 것의 주객과 처소를 면밀히 살펴 그 매카니즘을 파악해 내기 까지는, 마음이라는 총체적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는 않았던 것이 여태까지의 인간의식 역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무고?참구법`이라는 것이 그 인간의식의 진일보된 하나의 절대적 단초를 제시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화두선`이라고 불리우는, 공안들의 내용들입니다.
그러니 역사속에서 인간의식의 가장 진보된 열쇠가 이무고?라는 것이며 그 이무고?`라는 것은 곧, 화두` 또는 내용들로써 공안 이라 불리운다고 파악해야 합니다. 화두란 곧 의심, 그 자체 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두선'에 대한 인식의 시작입니다.
여기에 실참지를 수용하여 간화선이라 이름 지어질 수 있습니다.
[이~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있어서 [이~]라는 것은 생각과 내용을 뜻하며, [하는것이]는 주체 즉, 생각을 일으키고, 쓰는 것이 자기자신의 실체라는 인식의 전제이며, [무엇인가?]는 그 실체에 대한 증명을 요구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루에도 수만번씩 생겨나고 변하고 무너지는 생각이라는 것을, 일으키고 쓰고 사용하는 주인공 당체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모양일까?...] 이것이 곧 [이~하는 놈이 무엇일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무엇고?[이무고?]`라는 것입니다.
공안이란 관청에서 통용되고 인정 되어지는 공문서 형식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만, 이무고?`에 있어서 화두와 화미를 얼마나 잘 분간하는가를 판단하는 형식으로 이 공안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화두라는 것과 공안`이라는 것을 같다고 여길 수 도 있으나, 보다 면밀히 구분하자면 화두상태로 이끌기 위한 간화두가 공안이라 할 수 있으며, 공안의 뜻이 화두는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공안의 뜻을 모두 알아도 화두를 모르는 오늘날의 병통은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화두란 무엇일까요?,
많은 이 들이 화두가 방편이다`라고 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화두를 실지공부하지 않은 이 들의, 잘모르기에 하는 소리들 입니다.
화두, 공안, 화두참구, 는 각기 조금씩 다른 뜻을 내포 합니다. 그들이 이야기 하는 것은 화두참구 인데, 화두참구는 방편이 아니며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무이한 방법 입니다.
또한 깨달음을 표현하고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공안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화두란 또한, 벽`입니다.
달마의 면벽관과 언뜻 연관이 되기가 어렵습니다만, 생각의 상태로 동질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생각의 내용은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그 마음의 벽, 생각의 벽을 뛰어넘어 격외의 지혜를 발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이무고?참구가 없이 화두선`에서의 옳바른 깨달음은 존재 할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음...]
깨달음이란 화두선' 의 한 특징입니다. 이무고?참구법를 하지 않는다면 깨달음 또한 올 수 가 없습니다.
질문없는 대답이 없다는 것 뿐만 아니라, 많은 조사들이 역사속에서 증명해 놓은 방법론이라서, 그 안에는 몇천년 동안의 비밀이 함축된 형태로 간단히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문제에 대한 해답을 뜻하며, 그 해답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겠으나 주로 형태가 정해져 있기도 합니다.
화두참구가 성성할 때 의 깨달음만이 그것입니다.
이 깨달음 이라는 것은 자기자신 스스로 알 수 있으며 확신 할 수 있는 그러한 절대적 입니다.
또한, 옛사람의 전래를 따르고, 선지식을 찾아, 옳고 그름을 판단해 내어야 향상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옛사람과 동참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무고?`란 진리...]

이무고?`란 참구하는 그 상태를 그대로 올곧게 직입시키기에 진리 그 자체를 이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뿐 만은 아닙니다.
이름 할 수 없음을 이름 하는 이유가 있는데, 오래전 부터 인간에게 있어서 의식의 뿌리를 찾고자 했던 동양의 정신문화 역사는, 몇천년을 이어져 내려 오면서 결국, 이무고?`라는 우담화를 피우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부여된 존재의식과 미래의식을 중점으로한, 사고`라는 것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사고의 구조에서 부터, 토대가 되는 뿌리, 의식의 형성과정은, 예전이나 이제나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기본 과제에 해당하는 문제 였으며, 따라서 자연히 자신의 내면 의식을 살펴서 관`하고, 그 흐름의 관계를 밝히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으며, 그 상대적인 주변환경과 자신과의 상호간 입장에 힘을 쏟아, 그 자신의 역량에 따라 발전을 하게 됨은 자명한 일 일것입니다.
그것들은 서로 이어져 내려와 온갖 허례허식을 없애고, 가장 함축된 뜻으로 표현 되어져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화두선`이라 불리우는 간화두의 내용들 입니다. 그 내용들은 공안`이란 이름으로 불리워 지며, 이무고?`란 그 공안의 문 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바로 열쇠에 속합니다.
따라서, 이무고?`를 보지 못하면 공안의 내용도 알 수 없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 입니다.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음...]
나`라는 의식 의, 인식은 대략 5세 전후에 형성 되어 집니다. 그리하여 다시 귀천할 때 까지, 나`라는 의식속에 살아 갑니다만, 기실 이 나`라는 것은 존재 하지 않는 나` 입니다. 남이 없기 때문에 나`는 존재 할 수 없는 것입니다만, 다만 그 스스로가 알지 못할 따름 입니다. 내가 존재 하지 않는 이유는, 나` 스스로 배워 익힌것은 아무 것도 존재 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부모로 부터 부여 받은 몸과, 이름에서 부터, 가정환경, 학교, 사회, 역사로 부터 온 이 나`의 조각들은 생각의 파편으로 존재하여 의식과 사고를 결정 하는, 바로 그것 입니다.
마치 꼭두각시와 같아서 주변환경과 상대에 의해 의사결정을 하게 됨과 같습니다. 이 생각의 편린들이 모래알 이며, 그 많은 생각의 구조가 바로 모래를 쌓아 놓은 것과 같다 하여 비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구조와 생각의 형성을 밝혀보면 마치 모래알 더미와 같습니다.
“인간의 사고는 주변환경에 의해 결정 됩니다.” 여기서의 주변환경이란 일체의 모든 것을 얘기 합니다.
그래서, 사람 마다의 개성과 인격이 다른 것은 그 습의된 내용들이 다르기 때문이며 이것은 각기 모래알의 생김새가 다른것과 마찬 가집니다. “기억의 틀격을 벗어난 사유와 행동은 없습니다.
” 아는대로 사유하며, 의지 만큼 행동 합니다. 따라서, “사회 환경과, 교육은 미래를 결정 한다.”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를 결정하는 것은, 가정환경, 사회구조, 역사, 교육, 등 모든 토대와 구조들 입니다.
물질적 환경은 사고의 방향을 설정하며, 사고의 틀격은 물질환경을 만들어 갑니다.
마치 동전의 앞뒷면 같아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주고 받으며 만들어 가기에 물질은 정신을 의지하고, 정신은 물질에 의지 합니다.
따로이 분리시켜 바라보는 서구적물질 개념은 오류입니다.

[이무고?참구법...]
이무고?`란 도`를 깨닫기 위한 유일무이한 방법 입니다. 방법이라고 말하면 또한 방법이라는 굴레를 씌우는데, 무엇으로서 이무고?가 지시하는 화두상태 즉, 화두참구의 동질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의 상속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진 문화는 화두선 이외에는 역사적으로 미미합니다. 이러한 이유와 근거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 들은 곧 이무고?`가 방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무고?`는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이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사과를 먹어 보지도 못한 사람이, 맛은 그만 두고라도, 먹지 마라, 먹어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무고?'란 마치, 용광로`와 같아서 여우새끼가 오면 녹여붙여 사자새끼로 만들고, 사자새끼가 오면 제련시켜 금불상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불조사에 대한 믿음 없이는 이무고?참구법을 할 수 없음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이무고?참구란 곧 의심이며, 이 의심이 모든 것과 일체화 되어 뼈속 깊이 사무쳐야만이 진한 진리의 이치를 체득하게 될 것 입니다.
이것에는 자신의 목숨도 돌보지 않고 오직 구도의 일념을 구체화 시킨 선지식들의 결정체, 바로 그것 입니다.
이렇듯, 다만 사람 자신이 알고 모름이 있을뿐, 이무고?참구라는 방법은 도`를 깨닫기 위해 누구나 건너 가야할 관문, 그것입니다. 이무고?참구 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이~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바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와 다름 아닙니다.
의식이 있는 한 힘써 “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궁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이~란, 일체의 모든 생각을 뜻 합니다. 이무고?참구에 있어 가장 친절한 말은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고, 이무고?가 코끝에 있는가 만을 챙겨두라”는 경책어 일 것입니다. 이 외 가슴에 새겨야 할 뜻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이무고?참구를 하기 위해선, 고명한 선지식을 찾아가 이무고?를 받고, 그 선지식의 지도를 지속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는 바르고 삿되지 않은 길로 인도해 줄 등불을 의지함과 같습니다.
그리고, 대중과 같이 공부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이 와 비교하여 편협되지 않게금 하여 줍니다.
모두를 허락하지도 않지만, 누구도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동참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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