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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훈옹풀이

미래로보텍 2008. 1. 30. 23:25

천부경의 기원과 전래 차례

천부경의 기원과 전래
1. 들어가는 말.
2. 천부경의 유래(권태훈)
3. 천부경의 전래 기록


1. 들어가는 말.

만 여년 전 한나라?桓國?를 세워 인류 문명의 여명(餘命)을 열었던 한겨레가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나기 시작한 지 어언 1,500년이 되었다. 그 1,500여 년 동안 우리는 중국의 중화주의, 일본의 국수주의, 서구 열강들의 패권주의에 의하여 모진 굴욕과 침략과 문화적 수탈을 물심양면(物心兩面)에 걸쳐 수없이 당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세검한몸(삼신일체, 三神一體)이신 하느님께서는 오행순환(五行循環)의 천도에 따라 난법 시대였던 역사의 암흑기를 벗어나 새로운 새벽을 홰치는 무지개 빛을 마련하셨다. 어찌 먹구름과 소나기가 동반하지 않고 영롱한 무지개가 떠오를 수 있겠는가?

따라서 머지않아 새로운 정신개벽의 시대가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 이념을 뿌리로 하는 사해동포(四海同胞) 시대가 반드시 이루게 된다.
세계 문명의 주도국이 될 때가 문턱에 막다른 요즘 우리는 하늘의 뜻이 담긴 천부경(天符經)의 정통문화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2. 천부경의 유래(권태훈(權泰勳))

1989년 정신세계사에서 발간한 권태훈의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의 45쪽에서 이르길 겨레의 얼이 고동치는 어느 곳에나 그 정점(頂點)에는 천부경이 우뚝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단군 한배검의 숨결을 이어받은 우리의 선조들이 그 파란만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꿋꿋이 간직해 내려온 마음이 보물이 바로 이 천부경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사서(史書)는 왜곡될 수 있을지언정 면면히 흐르는 겨레의 얼과 그 정서는 왜곡시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는 실로 위대한 것이어서, 천부경의 문자 전승방법상 유한성을 고려해서, 여러 방식을 고안하여 널리 유포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숱한 세월 속에서도 우리의 역사는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천부경의 원리만은 오늘도 우리의 주변에서 생생하게 전해져 오고 있음은 곤지곤지, 가위 바위 보, 공기놀이와 고누판, 윷판, 장기판, 바둑판 등과 또 몇 가지 후대의 결정적인 유물들로써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천부의 이치는 우리 백두산 겨레가 처음 이 땅위에 자리했을 때 대황조(大皇祖)께서 처음 나오시어 사람을 가르치시고 다스리셨던 개천의 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대황조께서는 천부의 이치를 알●(주재주, 主宰主)이라 일깨워 주시며 백두산 문명의 기틀을 잡으셨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겨레의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의 연원(淵源)이며 천부경의 진정한 유래인 것이다.

최치원 선생도 이러한 전후 사정을 확연히 통찰하고 있었으나, 달리 뭐라 표현할 길이 없어 그저 현묘지도라는 말로써 한민족의 천부에 대한 숨길 수 없는 경의를 표출한 것이라 보여진다.
천부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알●로서 전해질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1만 년이 넘는 선사시대였다.

이것을 표현한 민속놀이로는 곤지곤지가 있고 알●을 상징한 문양?을 고조선시대 낙랑 고분(樂浪古墳)의 유물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약 5천 년 전의 단군 시대에는 천부인(天符印)이라는 도로방, 네모, 세뿔(원방각, 圓方角)의 형태로 전승되었고, 이 뜻을 가위, 바위, 보나 공기놀이, 그리고 고구려 사신도(四神圖)에서 살펴볼 수 있다.

3천~4천 년 전으로 내려와서는 81개의 수로써 천부의 뜻을 담아 내기 시작하였는데 우물고누, 윷판, 장기판, 바둑판 등의 놀이로 민간에 널리 전한다.
문자로써는 천부인 이후 형이상학적 상형문자로 천부경의 이치를 담아 냈으며, 지금의 한자로 표기된 천부경은 후기 신라말엽 고운 최치원 선생에 의해 이루어졌다.

3. 천부경의 전래된 기록

1) 상고시대
천부경의 기원과 전래는 우리 한겨레의 역사와 더불어 함께 하였다.

(1) 천부경(天符經)은 한임천제?桓因天帝?가 세운 한나라?桓國?시대에 구전(口傳)되었던 경전이다.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에 이르기를, 한 옛적 한임 시대로부터 전해져 온 천부경은 배달나라 한웅에 이어지고 또 단군에 이어지는 상고사회를 주도해 온 우리 한겨레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곧 그때 사회의 확고한 지도 원리, 생활 원리였던 것이다. 상고시대의 우리 한겨레는 천부경을 중심으로 강력한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고, 후대의 경제적, 사회 문화적 기초가 된 것이다. 곧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였으므로 종교 행사나 제천 행사에 문화의 기틀이 되었다.

(2) 배달나라 한웅천황?桓雄天皇?(단기 앞 1564년)이 태백산 신단수 밑에 임하여 신지 혁덕(神誌赫德)에게 녹도문(鹿圖文)으로 천부경(天符經)을 기록하게 하였다(일십당 이맥(一十堂 李陌)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神市本紀)).

(3) 한웅 천황이 몸소 삼신께 제사 지내고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펴고자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강론하니 모든 백성들이 크게 깨우쳤다.

(4) 한웅 천황이 지위리 한임의 분부를 받들어 사람들을 구제하셨다(홍익인간(弘益人間).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뇌공(雷公)들을 거느리고 신시(神市)에 이르니 사방 사람들이 구름과 같이 모여 천부경을 설교하였다(발해(渤海) 대야발(大野勃) 단기고사(檀奇古史)).

(5) 배달나라 제14대 자오지 천황(치우 천황) 때 자부선인(紫府仙人)이 윷놀이를 창안하여 한역?환역(桓易)?을 강연하니 대저 신지 혁덕이 기록한 천부경의 남긴 뜻이었다(일십당 이맥(一十堂 李陌)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神市本紀)).

(6) 단군왕검께서 이르길 천부경은 만세(萬世)의 강전(綱典)이니 아무도 이를 거스르지 못할 일이다(일십당 이맥(一十堂 李陌)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神市本紀)).

(7) 단군조선 제2대 단군 부루단제(夫婁檀帝) 26년(단기 120년) 때 석자장(石子丈)이 상주하기를, 시조의 천부경에 보면 삼신님이 만물을 지어... 도(道)의 근원이 삼신에서 나왔고 사람의 근본은 신조(神祖)에게서 나왔으니 삼신과 신조는 밀접하여 삼신이 곧 신조입니다.
바라옵기는 신조의 신전(神殿)을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경건히 사모하게 하고 신앙하게 하여 만고에 근본을 잊지 않는 도를 삼으소서 하니 단제께서 그렇게 하리라 하시고 삼신위(三神位)를 봉안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경배하게 하였다(대야발(大野勃) 단기고사(檀奇古史)).

(8) 단군조선 제11대 도해 단제(道奚檀帝) 46년(단기 489년) 3월 산남에서 삼신께 제사 지내고 그 날밤 음식과 술을 내려 백성들과 더불어 잔치를 크게 벌여 여러 가지 놀이를 함께 즐겼다. 이어 누전에 올라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강론하였다.

(9) 단군조선 제25대 솔나 단제(率那檀帝) 때 불조선 제33대 임나 불한(번한, 番韓) 8년(단기 1204년) 불조선의 불한은 천하에 조칙을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동리마다 천단(天壇)을 쌓도록 하였는데 천일지이(天一地二)를 응용하여 아래에 2개의 돌을 놓고 그 위에 한 개의 돌로 덮으라고 하였다(대야발(大野勃) 단기고사(檀奇古史)).

2) 삼국시대
상고시대에 우리 나라는 광대한 영토와 높은 문화 수준을 온 누리에 빛냈었다. 그러나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나라는 험난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끊임없이 쳐들어왔던 중국, 몽골, 거란, 여진, 일본, 서역 등 주변 여러 나라들의 침략과 이에 편승하여 정권을 유지한 반민족적 지배 세력에 의해 우리 나라는 민족의 전통성과 주체성을 지키느라 그 위기를 빈번히 넘겼고 고난에 찬 역정의 길을 견디어야 했다.

상고시대 한겨레에게 지도 이념이었고 백성들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았던 천부경도 민족사와 운명을 함께 하여 외래 사상이 지배하는 문화의 무대에서 물러나야 하는 수난을 겪어야 하였다. 그러나 재야 지식인들과 일반 백성들에겐 천부경이 정신적 지주요, 생명력의 원천으로 전승되어 왔던 것이다.
삼국 중에서 한겨레의 기상이 서러 광활한 대륙을 누볐던 고구려는 천부경의 전승한 나라였다.

그것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글은 이맥의 ?태백일사?<고구려 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양에 을밀대를 세우고 그곳에서 수도였다고 하는 을밀선인(乙密仙人)이 3천여 명의 조의선인(?衣仙人)을 모아 놓고 다물 흥방가(多勿興邦歌)를 제창케 하였다고 한다. 그 가사에 보면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 인용되고 또 가사의 여러 곳에 천부경과 천부경의 해설로 간주되는 삼일신고의 내용이 응용되어 있다.

3) 남북조시대
(1) 발해(대진국: 단기 3032~3259년)
역년은 228년간이었고 역대 황제는 14대이었다. 당(唐) 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신라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천부경 전래의 맥은 발해로 이어졌다.
대조영(大祚榮)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들이 옛 부여와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았다. 곧 광활한 고구려의 강역을 수복한 것이다.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 소중한 민족사 자료들이 멸실되고 불태워진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우리 나라 상고사와 천부경, 삼일신고 등의 한민족 고유사서나 경전을 되살리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태조 성무 고황제(聖武高皇帝)의 아우이자 대문호였던 대야발(大野勃)은 당나라를 원망하였는데, 그 까닭은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될 때 고구려, 백제사를 불태워 버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대야발은 상고사를 회복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다시 편찬하였고, 요동지방까지 영토를 넓힌 제4대 문황제(文皇帝)는 또 멸실될 것을 우려하여 경전을 돌집에 봉장(奉藏)하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문황제는 태학(太學)을 세워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 한단고사를 강론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사 125권을 편수하기도 하였다.

발해의 전성기였던 제11대 선황제(宣皇帝) 때에는 각 지방의 주현(州縣)에 이르기까지 태학 등의 교육기관을 두어 한겨레 사상을 기초한 교육에 힘썼다. 그러므로 방대한 영토와 높은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해동성국(海東聖國)이 되었다. 고도로 발달한 발해도 문약(文弱)에 빠진 나머지 228년만에 거란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2) 통일 신라
신라말의 대학자 최치원(崔致遠)은 천부경에 대한 신지(神誌)의 전문(篆文)을 옛 비석에서 보고 이를 한자 81자로 작첩(作帖)하여 오늘날까지 전래될 수 있었다. 최치원이 이르길 태백산에 단군의 전비(篆碑)가 있었는데 해독하기 어려우리라 보고 번역을 한 것이다.

4) 고려시대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천부경은 외래사상이 판치는 지배층의 문화 영역에서 소외되었으나 지식인과 민중들 사이에는 여전히 큰 영향을 주었다.

(1) 고려말의 대학자 이색(李穡)과 범세동(范世東)이 다 천부경 주해서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았다.

(2)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지은 이암(李 品+山)은 좌정승을 거쳐 공민임금 8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이명(李茗), 범세동(范世東)과 더불어 천보산 태소암에서 한단(桓檀) 때부터 전승되어 온 진결(眞訣)을 얻게 되었다. 이암은 말년에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 홍행촌에 들어가 ?단군세기(檀君世紀)?, ?농상집요(農桑輯要)?, ?태백진훈(太白眞訓)?의 행촌삼서(杏村三書)를 남겼다. 그런데 단군세기에는 천부경과 삼일신고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다.

5) 조선시대(단기 3725년~4243년)
(1) 유교와 사대주의 사상을 국시(國是)로 하여 건국한 조선시대는 시초부터 유교 사서를 제외한 책들 이단(異端)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아 왔다.
제3대 태종 11년(단기 3744년)에 송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5부학당을 성치하고 유학을 크게 장려하면서 13년에는 옛날부터 궁중과 서운관(書雲觀)에 비장하여 내려오던 ?신지비사(神誌秘詞)?, ?해동비록(海東秘錄)? 등을 비롯한 옛 사서와 서적들을 모두 태워 버린 것이다. 이때에 고유 경전이 실려 있 서책들도 함께 불태워졌다.

(2) 제4대 세종 임금은 옛 사서와 비기류(秘記類)를 널리 구하여 보존하도록 힘썼다.

(3) 제7대 세조 3년(단기 3790년) 제8대 예종 원년(3802년) 9월과 제9대 성종 원년(3802년) 12월 3차에 걸쳐서 친히 팔도 관찰사와 예조(禮曹)에 유시(諭示)를 내려 조선 팔도의 관, 민가와 사찰, 암자 고택 등에 소장되어 있는 도가사서(道家史書)들을 찾아 올리라는 구서령(求書令)을 내려 수거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정유재란(선조 25~31년)과 병자호란(인조 14~15), 이괄(李适)의 난(인조 2년)을 겪는 바람에 귀중한 사서들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제19대 숙종 원년(단기 4008년) 북애자(北崖子)가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발간할 때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하면서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지공기(誌公記)?, ?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 ?진역유기(震域遺記)? 등 여섯 가지 도가서를 수집하여 ?규원사화(揆園史話)?에 인용한 것으로 보아 조선 중엽까지는 도가서가 남아 있었다고 본다.

(4) 김시습(金時習, 단기 3768년~3826년)의 금척송(金尺訟)에서 천부경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천부경의 전문이 들어 있는 ?태백일사(太白逸史)?를 펴낸 이맥(李陌)은 김시습보다 약 20년 후세인 동시대 인물이고 남사고(南師古)는 이맥보다 30년 후세인 동시대 인물이다. 그러면 약 100년 동시대에 상당한 층에 천부경이 유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5) 이맥(李陌)은 중종(단기 3853년) 때 찬수관이었다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엮어 내면서 이르기를 세상이 비록 글자 하나라도 정주(程朱)의 성리학(性理學)에 합치되지 아니하면 마치 고슴도치의 형상처럼 무수한 화살이 날아든다. 유학자(儒學者)의 필봉(筆鋒)이 이처럼 가혹한 마당에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가르침을 어떻게 쉽게 전하고자 논할 수 있으리라 하고 탄식하고 있다.

이처럼 탄압이 심하였으니 은밀하게 전승되는 비경(秘經)이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맥은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엮으면서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전문을 실었다. 그것은 은밀하게나마 사상을 이어온 지사들은 사대주의의 현실에 굽히지 않고 민족의식이 투철한 뜻깊은 선비나 서민 대중이었다. 그래서 ?태백일사(太白逸史)?의 발문(跋文)에서 “때는 갑자년(연산군 10년) 괴산으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근신하니 매우 무료한지라, 집에 간직한 여러 궤짝들을 조사해 보니 사전(史典)으로 가치가 있는 것과 또 평소 여러 어른들에게서 들은 것들을 합쳐서 채록(採錄)하였는데 책으로는 엮어 내지 못하였던 바라. 그 뒤 16년(중종 15년)에 내가 찬수관(撰修官)이 되었기에 내각의 비밀 서적들을 얻어 열심히 연구할 수 있어 이를 앞의 원고에 곁들여 편찬하고 ?태백일사(太白逸史)?라 이름하였다. 그러하지만 감히 세상에 드러내 놓을 수 없어 이를 비장(秘藏)하노라.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문밖으로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일십당 이맥이 쓰다”라고 적었다.

(6) 남사고(南師古, 단기 3842~3904년)는 ?궁을도가(弓乙圖歌)?에서 이르기를, ‘신선되는 비법은 천부경뿐이라./ 조화가 무궁하니 천정명(天井名)은 생명수요,/ 천부경은 진경(眞經)이라./ 티끌세상 죄업(罪業) 장벽 깨는 길은/ 천부경을 한마음으로 외우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7) 정조임금은 5년에 삼성사(三聖詞)에 제사 지낼 때 치제문(致祭文)에서 ‘천부보전(天符寶篆)이 비록 사실적인 물징으로 보이지 않으나 신성(神聖)이 이로 해서 전수되어 왔으니 우리 동국 역사에서 기리고 빛내기 그 몇 해이런고’라고 하였다.

6) 일제 강점기
(1) 서기 1910년 11월부터 그 이듬해인 1911년 12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일본 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는 취조국(取調局)으로 하여금 일본 헌병, 경찰을 총동원하여 규장각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책방, 향교, 서원, 서당, 옛집, 권문세가 등을 급습하여 소장되어 있던 단군 관계 도가사서(道家史書)와 민족 고유사서 그리고 애국적인 서적들 약 20여만 권을 빼앗아 불태워 버렸다.

(2)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점한 뒤 우리의 상고사를 말살하기 위하여 조선사 편수사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사료(史料) 수집이라는 명목으로 위와 같은 사서들을 전후 약 27년 동안(1910~1937)에 걸쳐서 치밀한 계획으로 주기적이고 조직적으로 철저하리만큼 약탈하여 소각하거나 인멸한 것이다.

그 결과 규장각과 장서각을 비롯하여 이 땅에서 도가사서 또는 고유사서들은 일제히 자취조차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오로지 고려시대의 사서라고는 일제가 조선사 편찬의 기본 사서로 삼아 남겨 둔 삼국 이전의 상고사에 대하여는 한 마디의 기록도 찾아볼 수 없는 어용사서(御用史書)로써 관찬사(官撰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제왕운기(帝王韻紀) 그리고 단군 사실을 전형적인 불교 신화로 각색한 ?삼국유사(三國遺事)?만 남아 있게 되었다.

(3) 계연수(桂延壽,?~단기 4253년)는 일제의 강점을 전후해서 묘향산에서 수도했던 분이다. 단기 4244년 5월 ?한단고기(桓檀古記)?의 범례를 썼고 대한독립군 부총재인 홍범도(洪範圖) 장국과 정의부 총사령관인 오동진(吳東振)의 후원을 입어 계연수는 묘향산에 있는 단군굴 암자에서 ?한단고기(桓檀古記)?를 엮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계연수가 탁본(拓本)한 천부경(天符經)은 묘향산 석벽본인데 서울의 단군교당 앞으로 서신과 함께 보내 왔다.

사학자 이유립(李裕立)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한단고기(桓檀古記)?는 단기 4313년(1980)이 되거든 세상에 내놓으라는 유언을 계연수가 남겼다고 한다. 계연수는 뒷날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이었던 이상룡(李相龍)의 막하에서 참획군정이라는 중책을 맡아 큰공을 세웠다. 그러나 3.1운동 이듬해에 만주벌에서 왜적들에게 피살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4) 계연수의 천부경 서신
계연수가 천부경의 원본을 묘향산 석벽에서 박아 써 보낼 때의 것을 적노라.
제가 일찍이 스승에게서 들으니 동방의 거칠은 땅을 개척하신 할아버지 단군(檀君)님은 신인(神人)이시라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잡으시고 하늘로부터 세상에 내려 오시사 그 덕화가 행하여진 지 이제 사천 년여 년이 되는지라.

그 동안 어두움에 빠져서 이 삼인(三印)이 어떠한 것인지 또는 어떠한 보물인지를 알지 못하였나니 이 천부(天符)는 곧 단군께서 교화를 베푸신 글이라 오히려 이제야 세상에 전하게 되니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 재액(災厄)이 변화하여 길한 상서(祥瑞)가 되고, 어질지 못한 이가 변화하여 착한 이가 되나니 이같이 오랫동안 도를 이루면 자손이 번창하고 장수함과 부유됨이 계속되어 반드시 신선 결과를 얻을 것이요, 다만 어리석은 이라도 이 책 한 권을 감추어 가지면 가히 재앙을 면하리라 하신 바 제가 이를 마음속에 새겨 두고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였더니 정성껏 성품 단련함을 기능으로 삼고, 약 캐기를 업으로 삼아 명산에서 구름과 놀기를 십여 년 동안 하다가 지난 가을에 태백산(太白山, 묘향산의 옛 이름)에 들어가서 유심히 깊은 골짜기를 걸어감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곳에 이르니, 시내 위의 돌벽에 옛날에 새겨 놓은 것이 있는 듯한지라.

손으로 바위에 낀 이끼[苔蘚]을 쓸고 보니 글자 획(劃)이 분명한 천부경(天符經)이 나타는지라 두 눈이 문득 밝아옴에 절하고 꿇어앉아 공경히 읽으니, 한편으로는 단군 한배검(檀君天祖)의 보배로운 글임에 기쁘고, 한편으로는 고운 선생(孤雲先生, 최치원(崔致遠))의 기적(奇蹟)이 있음에 기뻐한지라. 마음속에 음을 비로소 깨닫고 이에 백 걸음이나 돌을 쌓아 그 길로 기억하게 하고, 돌아와 종이와 먹을 가지고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니 전날의 지나던 곳이 아니라 동서로 찾다가 마침내 산신령[山靈]에게 빌며 사흘 밤을 자고 비로소 찾아 얻으니, 이때는 구월 구일(단기 4249년)이라 겨우 한 벌을 박으니 글자가 심히 흐릿하여 다시 박으려 하니 구름과 안개가 문득 일어나느지라. 이에 그만 산 절[山寺]로 돌아와 밤이 새도록 풀어 보았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하였으니, 스스로 돌아 보건대 젊어서 배움이 짧고 늙어 총명함이 덜어짐으로 다시 연구하여 뚫을 길이 없고 다만 입으로 읽을 뿐이더니 마침 서울에서 온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서울에 단군교(檀君敎)가 있다 하는지라, 이 말을 듣고 심히 기뻐서 뜻으로는 가 보고자 하나 걸음이 어긋나서 그 뜻을 수행하지 못하고 덧없이 봄이 되는지라.

길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을 만나 박은 책을 드리오니 바라건대 이 글 뜻을 잘 풀어 중생(衆生)을 열어 가르치면 그들이 반드시 복록을 받고 교운(敎運)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그윽이 귀교(貴敎)의 하례(賀禮)가 됨이며, 또 들으니 단군 때에 신지(神誌)의 옛 글자[古文字]가 고구려(高句麗)에 전하여졌다 하니 깊이 구하여 만일 얻으면 다시 응당 보낼 계획이오나, 얻으면 다행이요, 얻지 못하면 보내지 못할지라도 신용이 없다 하지 마시고 양해하시기를 바라노라. 성심으로 수도함을 빌면서 정사(丁巳) 정월 초 열흘날 향산 유객(香山遊客) 계연수(桂延壽) 재배(再拜)
단군교당(檀君敎堂) 도하(道下)

원문(原文)
桂延壽書搭天符經原本於妙香山石壁送來時書
僕嘗聞之師 東方開荒之祖 檀君神人 持天符三印 自天降世 德化大行于今四千餘年 事在鴻? 未知三印 爲何物 如何寶物而天符 卽設敎之經 尙今遺傳處 人若得而誦之卽災厄 化爲吉祥 不良化爲仁善 九九成道卽子孫繁昌 壽富連綿 必得仙果 但愚昧者 藏之一本 可免災禍矣 云而僕 銘在心中 求之不得矣 浚乃鍊成爲工 採藥爲業 雲遊名山十許年矣 昨秋入太白山 信步窮源 行到人跡不到之處 澗上石壁 若有古刻 手掃苔蘚 字劃分明 果是天符神境 雙眼忽明 拜?經讀 一以喜檀君天祖之寶經 一以喜孤雲先生之奇蹟 心中充然 若有所得 始覺吾師不發虛言 乃百步疊石 記其道路 歸携紙墨 更入山中 非復前日經過處 東尋西覓 暗禱山靈 三宿而始得 時九月九日也 ?(겨우 재)搭一本 字甚模糊 更欲搭之 雲霧忽起 乃間關而返山寺 終夜解釋 不得要領 自顧少短學識 老滅聰明 無復硏之道 但口誦而已矣 適有自京來人 說到京城 有檀君敎云耳 聞心欣然 意欲躬往 足跡齟齬 未得遂意 荏재(草+再)發春 路逢歸京人 玆以搭本獻上 望須解釋經旨 開喩 衆生卽衆生 必受福祿 敎運從此發與矣 竊爲貴敎賀之 又聞檀世有神誌氏古文字 傳來又高麗云 竊惟求之若得之 更當付呈爲 然得之則幸矣 若不得而不送 勿以無信 垂諒焉
爲祝誠心修道 丁巳正月初十日
香山遊客 桂延壽 再拜

7) 광복 후(단기 4278년~4322년)
(1) 일제 찌꺼기
단기 4278년 우리 민족은 광복이 역사의 광복과 민족 자존의 광복은 아직까지도 미궁에 빠져 있다. 역사에서 일제의 어용기관인 조선사편찬위원회,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일본인 어용사학자들 일부와 친일파 식민사학자들이 합작하여 우리의 역사를 왜곡, 날조, 말살하기 위해 우리의 사서 수십만 권을 약탈하여 소각하고 인멸하여 버린 뒤 조직적으로 우리 역사를 말살, 왜곡한 끝에 식민지 통치의 도구로 쓰기 위해 이른바 [조선사] 35권을 꾸며 놓은 것이다.

그래서 식민지 통치 이론에 부합되는 이론적 근거를 구축하기 위하여 [조선사]의 합리성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수많은 학설과 논문을 발표하고 여러 간행물과 교재를 펴내 이른바 식민지사관으로 날조하여 정립한 뒤에 우리 겨레에게 읽히고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교육 정책을 쓴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빛나는 역사와 정통 문화와 위대한 조상들의 업적 등은 덮어두고 가능한 한 우리 민족이 겪어 온 치욕과 우리 조상들의 무능한 행적이나 나쁜 점만 들추어내어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우리 역사와 정통문화와 조상들에 대해 멸시하는 정서를 가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반면에 일본 역사, 문화, 인물에 대해서는 동경과 흠모하는 기풍을 조성하여 장차 우리 민족의 말과 성씨까지 말살하고 우리 민족을 영원히 일본에 동화시키려고 획책하는 교묘하고도 치밀한 한일 일체 교육방식을 기안하고 식민지 사관을 철저하게 주입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그 잔재나 식민지 사관의 주구들이 버젓이 살아남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어설픈 휘호로 민족을 희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역사 교육을 받은 기성세대들이 조국이 광복된 후에도 일제가 심어 놓은 식민지 사관의 치명적인 해독에서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조선사 편수작업에 관여한 친일파 사학자가 광복 후에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이 나라 사학계를 주름잡고 있어 올바른 우리 역사 회복의 전망은 죽음에 이르지 않고 고칠 수 없는 난치병이라 아직도 요원한 실정이라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