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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미래로보텍 2008. 2. 1. 23:50
 증장(增長)하여 혹은 보고 혹은 들어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 연(緣)이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연(近緣)이니 속히 제도를 얻게 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원연(遠緣)이니 구원겁(久遠劫)에 제도를 얻게 하는 까닭이다. 이 근(近)과 원(遠)의 이연(二緣)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가? 첫째는 증장행연(增長行緣)이요, 둘째는 수도연(受道緣)이다. 평등연(平等緣)이란 것은 일체의 모든 볼보살(佛菩薩)이 다 일체의 중생을 도탈(度脫)하기를 원하여 자연히 훈습(熏習)하여 항상 버리지 아니 해서 동체(同體)의 지력(智力)을 쓰는 연고로 보고 들음을 따라 응해서 작업(作業)을 나타낸다. 이른바 중생이 삼매(三昧)를 의지하여야 이에 평등하게 모든 부처님을 친견(親見)함을 얻는 까닭이다.

8. 체용합설(體用合說)인 미상응(未相應)과 이상응(已相應)

이 체용(體用)의 훈습(熏習)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가? 첫째는 미상응(未相應)이니 이른바 범부이승(凡夫二乘)과 처음 뜻을 발한 보살들이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훈습(熏習)해서 신력(信力)을 의지한 까닭에 능히 수행하나 분별이 없는 마음이 체(體)와 더불어 서로 응함을 얻지 못한 까닭이며, 자재업(自在業)으로 수행하여 용(用)와 더불어 서로 응함을 얻지 못한 까닭이요, 둘째는 이상응(己相應)이니 이른바 법신보살(法身菩薩)이 분별없는 마음이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작용과 더불어 서로 응함을 얻는 것이다. 오직 법력(法力)을 의지하여 자연히 수행하여 진여(眞如)를 훈습(熏習)해서 무명(無明)을 멸(滅)하는 까닭이다.

9. 염정진부진(染淨盡不盡)의 의미

다시 염법(染法)이 비롯함이 없는 옛날부터 훈습(熏習)하여 끊어지지 않다가 이에 부처를 이룬 뒤에야 곧 끊어짐이 있는 것이요, 정법훈습(淨法熏習)은 끊어짐이 없어서 미래를 다함이니 이 뜻이 어떠한 것인가? 진여법(眞如法)이 항상 훈습(熏習)하는 까닭으로 망녕(妄 )된 마음은 곧 멸하고 법신(法身)이 나타나 용훈습(用熏習)을 일으키기 때문에 끊어짐이 없는 것이다.

제4절 삼대(三大)

1. 체대(體大)와 상대(相大)

1) 진여(眞如)의 자체상(自體相)


다시 진여자체상(眞如自體相)이란 것은 일체의 범부(凡夫)·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 모든 부처님이 더하고 덜함이 없어서 전제(前際)에 생(生)한 것도 아니며 후제(後際)에 멸(滅)하는 것도 아니다. 필경(畢竟)에 항상 해서 본래부터 자성(自性)에 일체의 공덕(功德)이 만족(滿足)하다. 이른바 자체(自體)에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뜻이 있는 까닭이며, 법계(法界)에 두루 비추는 뜻인 까닭이며, 진실로 아는 뜻인 까닭이며,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뜻인 까닭이며, 상(常)·낙(樂)·아(我)·정(淨)의 뜻인 까닭이며, 청량(淸凉)하고 불변(不變)하는 자재(自在)의 뜻인 까닭이다. 이와 같이 항하사(恒河沙)에 지나는 여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불가사의한 불법(佛法)을 구족(具足)하여 이에 만족함에 이르러 조금도 모자라는 바의 뜻이 없는 까닭으로 이름을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며 또한 이름을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고 한다.

2) 중현체대상대(重顯體大相大)

[묻는다] 위에서 설했던 진여(眞如)는 그 체(體)가 평등하여 일체의 상(相)을 여의었다고 하고 어찌하여 다시 체(體)에 이와 같은 가지가지의 공덕이 있다고 설하는가?

[답한다] 비록 진실로 이 모든 공덕의 뜻이 있으나 차별(差別)의 상(相)이 없어서 일미(一味)가 평등하게 똑같아서 오직 하나인 진여(眞如) 뿐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분별(分別)이 없으며 분별의 상(相)을 여의었다. 이런 까닭으로 둘이 없는 것이다. 다시 무슨 뜻으로 차별을 설하는가? 업식(業識)의 생멸상(生滅相)을 의지하여 보인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보였는가? 일체의 법이 본래 오직 마음 뿐이라 실로 염이 없으나 망심(妄心)이 있어서 불각(不覺)에 염(念)을 일으켜서 모든 경계(境界)를 본다. 그러므로 설하여 무명(無明)이라고 한 것이니 심성(心性)이 일어나지 아니 하면 곧 이것이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뜻인 까닭이다. 만약 마음이 견(見)을 일으키면 곧 불견(不見)의 상(相)이 있거니와 심성(心性)이 견(見)을 여의면 곧 이것이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인 까닭이다. 만약 마음이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며 자성(自性)이 없어서 상(常)도 아니오, 낙(樂)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오, 정(淨)도 아님이니 열뇌(熱惱)하고 쇠변(衰變)하면 곧 자재(自在)하지 못하며, 나아가 항하사(恒河沙)에 지나는 등의 망념(妄念)의 뜻을 갖추어 있으니 이 뜻을 상대한 까닭으로 심성(心性)이 움직임이 없으면 곧 항하사(恒河沙)에 지나는 등 모든 정공덕상(淨功德相)의 뜻을 시현(示現)함이 있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일어남이 있어서 다시 전법(前法)을 가히 생각할 것을 보는 자는 곧 모자라는 것이 있겠지만 이와 같이 정법(淨法)의 무량한 공덕이 곧 이 일심(一心)이라 다시 생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만족한 것이니 이름을 법신여래(法身如來)의 장(藏)이라고 한 것이다.

2. 용대(用大)

1) 진여(眞如)와 용대(用大)


다시 진여(眞如)의 용(用)이라는 것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이 본래 인지(因地, 과거에 닦은 성불의 원인 즉 수행)에 있어서 큰 자비(慈悲)를 발하여 모든 바라밀(波羅蜜)을 닦아서 중생을 섭화(攝化)하며, 큰 서원을 세워 다 평등이 중생계를 제도하여 해탈하고자 하며, 또한 겁수(劫數)를 한정하지 아니해서 미래를 다하며, 일체중생을 취하기를 자기 몸과 같이 하는 까닭으로 중생상(衆生相)을 취하지 아니한 것이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른바 여실히 일체의 중생과 다만 자기의 몸이 여실평등(如實平等)하여 별 다름이 없는 줄 아는 연고이다. 이와 같은 큰 방편(方便)의 지혜가 있어 무명(無明)을 제멸(除滅)하고 본법신(本法身)을 보아서 자연히 부사의(不思議)한 업(業)의 갖가지의 작용이 있는지라 곧 진여(眞如)와 더불어 평등해서 일체처에 두루하며, 또한 작용의 상(相)을 가히 얻을 수 없는데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이 법신지상(法身智相)의 몸이라 제일의제(第一義諦)에는 세속(世俗)의 경계(境界)가 없어서 시위(施爲)하는 작용을 여의었건만 다만 중생의 보고 듣는 것을 따라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에 작용이라고 설한다.

2) 응신(應身)과 보신(報身)

이 작용이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가? 첫째는 분별사식(分別事識)을 의지한 범부(凡夫)와 이승(二乘)의 마음에 보는 바를 이름을 응신(應身)이라고 한다. 전식(轉識)의 나타남인 줄을 알지 못하는 연고로 밖으로 쫓아옴을 보아서 색(色)의 분제[分齊, 즉 색상(色相)의 한계(限界)]를 취하나니 능히 다 알지 못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업식(業識)을 의지한 것이니 이른바 모든 보살이 처음 뜻을 발함으로부터 이에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보는 것을 이름을 보신(報身)이라 한 것이다.

몸에 한량없는 빛깔이 있으며 빛깔에 한량없는 모양이 있으며 모양에 한량없는 좋은 것이 있으니 머무르는 바의 의과[依果, 즉 의보(依報)인 기세간(器世界)]에도 또한 한량없는 갖가지의 장엄(莊嚴)이 있어서 곳을 따라 시현(示現)해서 곧 갓이 없으며, 가히 다할 수 없어서 분제(分齊)의 상(相)을 여의었으며, 그 응할 바를 따라서 항상 능히 머물러 가져서 헐지도 아니하고 잃지도 아니 한다. 이와 같은 공덕이 다 모든 바라밀(波羅蜜) 등 샘이 없는 수행의 훈습(熏習)과 및 부사의(不思議)한 훈습(熏習)을 인하여 성취한바라 한량없는 낙상(樂相)이 구족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보신(報身)이라고 설한 것이다. 또 범부의 보는 바는 이것은 그 거친 형색이니 육도(六道)의 중생이 각각 보는 것이 같지 아니 하여 가지가지의 다른 무리가 낙상(樂相)을 받지 못함을 따르기에 응신(應身)이라고 설한다.

3) 응신(應身)과 보신(報身)을 다시 밝힘

다시 처음에 뜻을 발한 보살들이 보는 바는 깊이 진여(眞如)의 법을 믿는 연고로 조금 보는지라 저 색상장엄(色相莊嚴) 등의 일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어서 분제(分齊)를 여의었으니 오직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나서 진여(眞如)를 여의지 아니한 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보살이 오히려 스스로 분별하는 것은 아직 법신(法身)의 지위에 들지 못한 까닭이다. 만약 정심(淨心)을 얻으면 보는 바가 미묘하여 그 작용이 더욱 수승(殊勝)할 것이요. 이에 보살진지(菩薩地盡)에 이르면 보는 것이 구경(究竟)일 것이며, 만약 업식을 여의면 곧 보는 상(相)이 없을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피차(彼此)의 색상으로부터 서로 볼 수 없는 까닭이다.

[묻는다] 만약 모든 부처님의 법신(法身)이 색상(色相)을 여의었다면 어찌하여 능히 색상을 나타내는가? [답한다] 곧 이 법신(法身)이 이 색상(色相)의 체(體)인 연고로 능히 색(色)을 나타낸다. 이른바 본래부터 빛깔과 마음이 둘이 아닌 것이다. 색성(色性)이 곧 지(智)인 연고로 색(色)의 체(體)가 형상이 없으니 이름을 지신(智身)이라 설라는 것이요, 지성(智性)이 곧 색인 연고로 이름을 법신(法身)이 일체처(一切處)에 두루한 것이라 설한 것이다. 나타난 바의 색이 분제(分齊)가 있지 아니한지라 마음을 따라서 능히 시방세계(十方世界)의 한량없는 보살과 한량없는 보신(報身)과 한없는 장엄(莊嚴)을 시현(示現)하니 각각으로 차별해서 다 분제(分齊)가 없으나 서로 방해하지 않는지라 이것은 심식(心識)의 분별로 능히 알지 못할지니 진여(眞如)의 자재(自在)한 작용의 뜻인 까닭이다.

4) 생멸문(生滅門)으로부터 진여문(眞如門)에 득입(得入)함

다시 생멸문(生滅門)으로 쫓아 곧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오음(五陰)을 미루어 구하면 색(色)과 마음이며 육진(六塵)의 경계는 필경(畢竟)에 염(念)이 없는 것이니 마음은 형상(形相)이 없는 지라 시방(十方)에 구할지라도 마침내 가히 얻을 수 없음이니 마치 사람이 미혹한 까닭으로 동(東)을 일러 서(西)라 하나 방위(方位)는 실로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이 중생도 또한 그러해서 무명(無明)의 미혹인 연고로 마음을 일러 염(念)이라 하나 마음은 실로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능히 관찰해서 마음이 무념(無念)인줄 알면 곧 수순(隨順)하여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감을 얻는 연고이다.

제2항 대치사집(對治邪執)

1. 두 가지의 사집(邪執)


사집(邪執)을 대치(對治)한다는 것은 일체의 사집(邪執)이 다 아견(我見)을 의지했으니 만약 아(我)를 여의면 곧 사집(邪執)이 없어질 것이다. 이 아견(我見)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가? 첫째는 인아견(人我見)이요, 둘째는 법아견(法我見)이다.

2. 다섯 가지의 인아견(人我見)

인아견(人我見)이라 함은 모든 범부를 의지해서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설했으니 어떤 것이 다섯인가? 첫째는 수다라(修多羅)에 설하시길, "여래의 법신(法身)이 필경에 적막(寂寞)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함을 듣고 집착함을 파(破)하기 위한 것인 줄을 알지 못하는 연고로 곧 이른바 허공이 여래(如來)의 성(性)이라고 한다. 어떻게 대치(對治)하는가? 허공의 상은 이것이 그 망령된 법이라, 체(體)에는 실답지 못함이 없음을 밝혔으니 색(色)을 대하는 까닭으로 있는 지라 이것이 가히 볼 상(相)이며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生滅)케 한다. 일체의 법(法)이 본래 이 마음이라 실로 색외(外色)이 없는 것이니 만약 색이 없으면 곧 허공의 상(相)이 없다. 이른바 일체의 경계가 오직 마음이 망령되이 일어난 까닭으로 있는 것이니 만약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임을 여의면 곧 일체의 경계가 멸할 것이요. 오직 하나인 진심(眞心)이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다. 이것은 이른바 여래의 넓고 큰 성지구경(性智究竟)의 뜻이라 허공의 상(相)과는 같지 않는 까닭이다.

둘째는 수다라(修多羅)에 설하시길, "세간의 모든 법이 필경에 체가 공하며 나아가 엽반(涅槃) 진여(眞如)의 법이라도 또한 필경에 공(空)하여 본래 스스로 공한지라 일체의 상을 여의었다"하는 것을 듣고 집착함을 파하기 위한 것인 줄을 일지 못하는 연고로 곧 이른바 진여열반(眞如涅槃)의 성(性)도 오직 이 공(空)한 것이라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진여법신(眞如法身)은 자체(自體)가 공(空)하지 아니하여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이 구족한 것을 밝힌 까닭이다.

셋째는 수다라(修多羅)에 설하시길, "여래의 장(藏)이 증감(增感)이 없어서 체에 일체공덕의 법을 갖추었다"는 말을 듣고 알지 못하는 까닭으로 곧 이르되 여래의 장(藏)이 색심법(色心法)이 있어서 자상(自相)이 차별한다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오직 진여(眞如)의 뜻을 의지하여 설한 까닭이요, 생멸염(生滅染)의 뜻을 인하여 시현(示現)으로 차별을 설한 까닭이다.

넷째는 수다라(修多羅)에 설하시길, "일체세간의 생사염법(生死染法)이 다 여래장(如來藏)을 의지하여 있는지라, 일체의 모든 법이 진여(眞如)를 여의지 아니 했다"함을 듣고 알지 못하는 연고로 이른바 여래장(如來藏)의 자체에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생사(生死) 등의 법(法)이 갖추어 있다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여래장(如來藏)이 본래부터 오직 항하사(恒河沙)에 지나는 등의 모든 성공덕(性功德)이 있어 여의지도 아니하고 끊어지지도 아니 해서 진여(眞如)의 뜻과 다르지 아니한 까닭이다. 항하사(恒河沙)에 지나는 등의 번뇌(煩惱)의 염법(染法)은 오직 이 망으로 있는 지라 성품이 스스로 본래 없어서 시작 없는 세상으로부터 옴으로 일찍이 여래장(如來藏)과 더불어 서로 응하지 못한 까닭이다. 만약 여래장(如來藏)이 체(體)에 망법(妄法)이 있다면 증득(證得)하여 이회(理會)함에 길이 망을 쉰다는 것이 옳은 곳이 없을 것이다.

다섯째는 수다라(修多羅)에 설하시길, "여래장(如來藏)을 의지하는 연고로 생사가 있으며 여래장을 의지하는 연고로 열반(涅槃)을 얻는다"고 하는 것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이르되 중생이 비롯함이 있다 하며, 비롯함을 보는 까닭으로 다시 이르되 여래의 얻은 바 열반도 그 종국에 다함이 있어 도리어 중생을 짓는다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여래의 장이 전제(前際)가 없는 연고로 무명(無明)의 상(相)도 또한 비롯함이 없으니 만약 삼계(三界)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으로 일어남이 있다고 말하면 곧 이것은 외도경(外道經)의 설이니라. 또 여래장(如來藏)이 후제(後際)가 없으니 모든 부처님의 얻은 바 열반(涅槃)도 이와 더불어 서로 응해서 곧 후제(後際)가 없는 까닭이다.

3. 법아견(法我見)

법아견(法我見)이라 함은 이승(二乘)의 둔근(鈍根)을 의지하는 연고로 여래(如來)가 다만 위하여 인무아(人無我)만 설했으나 설한 것이 구경이 아닌지라 오음(五陰)이 생멸(生滅)하는 법이 있는 것을 보아서 생사를 두려워하고 망령되이 열반을 취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오음(五陰)의 법은 자성이 생하지 아니하여 곧 멸함이 없으니 본래 열반인 까닭이다.

4. 구경에 집착을 여읨을 밝힘

다시 구경에 망령된 집착을 여읜다는 것은 마땅히 알라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다 상대(相待)하는지라, 자체의 상을 가히 말할 수 없음이니 이런 까닭으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색(色)도 아니오, 심(心)도 아니며, 지(智)도 아니오, 식(識)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오, 없는 것도 아닌지라, 필경에 가히 상(相)을 설할 수 없건만 언설이 있는 것은 마땅히 알라 여래(如來)가 선교(善巧)한 방편으로 언설을 가자(假藉)해서 중생을 인도하시니 그 지취(旨趣)는 다 염(念)을 여의고 진여(眞如)에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일체의 법(法)을 생각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生滅)하게 해서 실지(實智)에 들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다.

제3항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

1. 총설(總說)


불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라 함은 이른바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證得)하신 도(道)에 일체의 보살이 발심(發心)하여 수행(修行)해 나아간다는 뜻인 연고이다. 간략히 말하면 발심(發心)에 세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셋인가? 첫째는 믿음을 성취한 발심[發心, 십신(十信)과 십주(十住)]이요, 둘째는 알고 행하는 발심[發心, 십행(十行)과 십회향(十廻向)]이요, 셋째는 증득(證得)한 발심[發心, 십지(十地)]이다.

2.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믿음을 성취한 발심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라 함은 어떠한 사람을 의지하며 어떠한 행을 닦아야 믿음을 성취(成就)해서 감당하여 발심(發心)할 수가 있을까? 이른바 부정취(不定聚)의 중생이 선근(善根)을 훈습(熏習)한 힘이 있는 까닭에 업(業)의 과보(果報)를 믿어 능히 십선(十善)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무상보리(無上菩提)를 구하고자 하여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친히 받들어 공양(供養)하고 신심(信心)을 닦아 행하되 일만겁(一萬劫)을 지나서 신심(信心)을 성취(成就)한 연고로 모든 불보살(佛菩薩)이 가르쳐서 발심(發心)하게 하며 혹은 대비(大悲)를 쓰는 연고로 능히 스스로 발심(發心)하며, 혹은 정법(正法)이 멸하고자 함으로 인해서 법(法)을 보호(保護)하는 인연(因緣)을 쓰는 연고로 능히 스스로 발심(發心)한다. 이와 같이 신심(信心)을 성취하여 발심(發心)하는 자는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서 필경에 물러가지 아니한다. 이름하여 여래종(如來種) 가운데에 머물러서 정인(正因)과 상응(相應)한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중생이 선근(善根)이 아주 미세하여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번뇌(煩惱)가 아주 두터워서 비록 부처님을 만나 또한 공양(供養)을 올리지만 그러나 인천(人天)의 종자(種子)만을 일으키며 혹은 이승(二乘)의 종자(種子)만을 일으킨다. 설사 대승(大乘)을 구하는 자가 있더라도 근기(根機)가 일정하지 아니한지라 혹은 전진(前進)하고 혹은 후퇴(後退)하며 혹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이 있지만 아직 일만겁(一萬劫)을 지나지 못했지만 저 가운데 불연(佛緣)을 만나 또한 발심(發心)한다. 이른바 부처님의 색상(色相)을 보고 그 마음을 발하며 혹은 여러 스님께 공양(供養)함으로 인해서 그 마음을 발하며 혹은 이승인(二乘人)의 가르침을 인하여 발심(發心)하며 혹은 다른 이에게 배워서 발심(發心)한다. 이와 같은 등의 발심(發心)은 다 일정하지 아니 해서 만약 악(惡)한 인연(因緣)을 만나면 혹은 문득 물러가서 이승(二乘)의 자리에 떨어지고 만다.

1) 발심(發心)의 양상(樣相)-직심(直心)·심심(深心)·대비심(大悲心)

다시 믿음을 성취하여 마음을 발한다는 것은 어떠한 마음을 발한다는 것인가? 간략히 세 가지로 설한다. 어떤 것을 셋이라 하는가? 첫째는 곧은 마음이니 올바른 진여(眞如)의 법(法)을 생각하는 연고요.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즐거이 일체의 모든 선행(善行)을 모으는 연고요. 셋째는 대비심(大悲心)이니 일체중생(一切衆生)의 괴로움을 빼어 주고자 하는 연고이다.

[묻는다] 위에서 설하기를 법계(法界)가 일상(一相)이요, 부처님의 법체(法體)가 둘이 없다 하였거늘 무슨 까닭으로 오직 진여(眞如)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선행(善行)을 구하고 배움을 가자(假藉)하는가?

[답한다] 비유하면 큰 마니(摩尼)의 보배가 체성(體性)이 밝고 조촐하나 광예(鑛穢)의 때가 있다. 만약 사람이 비록 보배의 성(性)을 생각하나 방편(方便)으로써 갖가지로 갈고 다스리지 아니하면 마침내 청정(淸淨)함을 얻을 수 없는 거와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眞如)의 법도 체성(體性)이 텅 비어 조촐하나 한량없는 번뇌(煩惱)의 때에 물듦이 있다. 만약 사람이 비록 진여(眞如)를 생각하나 방편(方便)으로써 갖가지로 훈수(熏修)하지 않으면 또한 청정함을 얻지 못한다. 때가 한량이 없어서 일체의 법에 두루한 까닭으로 일체의 선행(善行)을 닦아서 대치한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일체의 선법을 닦아 행하면 자연히 진여(眞如)의 법에 귀순(歸順)하는 까닭이다.

2) 진여(眞如)에 귀순(歸順)하는 네 가지 방편(方便)

간략히 말하면 방편(方便)에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넷이라 하는가? 첫째는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다. 이른바 일체의 법(法)의 자성(自性)이 무생(無生)인 것을 관(觀)해서 망견(妄見)을 여의어 생사에 머물지 아니 하며, 일체의 법이 인연(因緣)으로 화합하여 업과(業果)를 잃지 않음을 관(觀)해서 대비를 일으켜서 모든 복덕(福德)을 닦아 중생을 섭화(攝化)해서 열반(涅槃)에 머물지 아니하는 것이니 법성(法性)의 머무름이 없음을 수순(隨順)하는 까닭이다.

둘째는 능히 그치는 방편이다. 이른바 부끄럽게 여기고 허물을 뉘우쳐 능히 일체의 악법(惡法)을 그쳐서 하여금 더 자라지 않게 하는 것이니 법성(法性)의 모든 허물 여읜 것을 수순(隨順)하는 까닭이다.

셋째는 선근(善根)을 발기(發起)해서 증장(增長)한는 방편(方便)이다. 이른바 부지런히 삼보(三寶)에게 공양(供養)하고 예배(禮拜)하며, 찬탄(讚歎)하고 따라 기뻐하며, 모든 부처님께 권청(勸請)한다. 삼보(三寶)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순수한고 두터운 마음인 까닭으로 믿음이 증장(增長)하여 이에 능히 뜻으로 무상(無上)의 도(道)를 구하며, 또 불법승(佛法僧)의 힘에 위호(慰護)된 연고로 능히 업장(業障)을 소멸하여 선근(善根)에서 물러나지 아니하니 법성(法性)의 치장(癡障)을 여위어 수순(隨順)하는 까닭이다.

넷째는 대원(大願)이 평등한 방편(方便)이다. 이른바 원(願)을 발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해서 남음이 없게 하며, 모두가 무여열반(無餘涅槃)을 구경으로 하게 하는 것이니 법성(法性)이 끊임없음에 수순(隨順)하는 까닭이요, 법성(法性)이 광대하여 일체에 두루해서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피차를 생각하지 아니 해서 구경에 적멸(寂滅)한 까닭이다.

3) 발심(發心)한 이익

보살이 이 마음을 발한 까닭으로 곧 조금 법신(法身)을 뵐 수 있으니 법신을 보는 연고로 그 원력(願力)을 따라서 능히 여덟 가지를 나투어서 중생을 이익(利益)케 한다. 이른바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물러나시어 태에 들어가 모태에 머무시다가 모태에서 나와 출가(出家)하여 도(道)를 이루어서 법륜(法輪)을 굴리시고 열반(涅槃)에 드신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을 아직 법신(法身)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은 그 과거 무량한 세상으로부터 옴으로 유루(有漏)의 업을 능히 결단하지 못한지라 그 태어나는 곳을 따라서 적은 괴로움과 더불어 서로 응하나 또한 업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다. 큰 원력(願力)의 자재(自在)로운 힘이 있는 까닭이다. 저 수다라(修多羅) 가운데 혹은 악취(惡趣)에 떨어짐이 있다고 설한 것은 그 실로 물러남이 아닌지라 다만 초학(初學)의 보살이 아직 정위(正位)에 들지 못하여 해태(懈怠)한 자를 위해서 두렵게 하여 저로 하여금 용맹하게 하는 까닭이다. 또 이 보살이 한번 발심(發心)한 뒤에는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어 필경(畢竟)에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만약 무량무변한 아승지겁(阿僧祗劫)에 어려운 행을 부지런히 하여 이에 열반(涅槃)을 얻는다 함을 들을지라도 또한 겁약(怯弱)치 않나니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스스로 열반(涅槃)인 줄 믿어 아는 까닭이다.

3. 해행발심(解行發心)

알고 행하는 발심(發心)이라 함은 마땅히 알라 점점 수승(殊勝)해지는 것이다. 이 보살이 처음 정신(正信)으로부터 오면서 제일아승지겁(第一阿僧祗劫)이 장차 만족코자 하는 연고로 진여(眞如)의 법(法) 가운데서 깊이 아는 것이 앞에 나타나 닦는 바가 상(相)을 여읜 것이다. 법성(法性)의 자체에는 간탐(간貪)이 없음을 아는 연고로 수순(隨順)하여 단바라밀(檀波羅蜜)을 수행하며, 법성(法性)에는 물듦이 없어서 오욕(五欲)의 허물 여읨을 아는 연고로 수순(隨順)하여 시바라밀(尸波羅蜜)을 수행하며, 법성(法性)에는 괴로움이 없어서 진뇌(瞋惱)여읨을 아는 연고로 수순(隨順)하여 찬제바라밀(찬提波羅蜜)을 수행하며, 법성(法性)에는 몸과 마음의 상(相)이 없어서 해태(懈怠)여읨을 아는 연고로 수순(隨順)하여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을 수행하며, 법성(法性)에는 항상 선정(禪定)하여 체(體)에 어지러움이 없음을 아는 연고로 수순(隨順)하여 선바라밀(禪波羅蜜)을 수행하며, 법성(法性)에는 체(體)가 밝아서 무명(無明)을 여읨을 아는 연고로 수순하여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수행한다.

4. 증발심(證發心)

증발심(證發心)이라 함은 정심지(淨心地)로 쫓아 이에 보살의 구경지(究境地)에 이르도록 무슨 경계를 증득(證得)하는 것인가? 이른바 진여(眞如)인 것이니 전식(轉識)을 의지해서 설하여 경계라고 했으나 이를 증득한 이는 경계가 없는 것이요, 오직 진여지(眞如智) 뿐이니 이름을 법신(法身)이라고 한 것이다.

이 보살이 한 생각 사이에 능히 시방(十方)의 나뭄이 없는 세계에 이르러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법륜(法輪)을 전하시기를 청한다. 오직 중생을 열어 인도하여 이익되게 하기 위한 것이지 문자를 의지하지 아니 했으며, 혹은 십지(十地)에 뛰어나 속히 정각(正覺) 이룸을 보인 것이니 겁약(怯弱)한 중생을 위한 연고요. 혹은 내가 무량한 아승지겁(阿僧祗劫)에 마땅히 불도를 이루리라 설하여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을 위한 연고이다. 능히 이와 같이 무수한 방편을 보인 것이 가히 사량하고 논의할 수 없으나 실로 보살은 종성(種性)과 근(根)이 같으며, 발심(發心)이 곧 같으며, 증득(證得)한 것이 또한 같아서 초과하는 법이 없으니 일체보살이 다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을 지나는 연고이다. 다만 중생의 세계가 같지 아니함과 보는 것과 듣는 것의 근(根)과 욕(欲)과 성(性)이 다르기 때문에 따랐을 뿐이므로 수행한 것도 또한 차별(差別)이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5. 발심(發心)과 증발심(證發心)의 공덕(功德)이 성만(成滿)한 양상

또 이 보살의 발심(發心)한 양상이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양상이 있으니 어떠한 것을 셋이 라 하는가? 첫째는 진심(眞心)이니 분별이 없는 까닭이요. 둘째는 방편심(方便心)이니 자연히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까닭이요. 셋째는 업식심(業識心)이니 미세하게 일어나고 멸하는 까닭이다. 또 이 보살에게 공덕(功德)이 성만(成滿)하여 색구경처(色究竟處)에 일체세간의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인다. 이른바 한 생각이 응한 지혜로써 무명(無明)이 문득 다한 것이 이름이 일체종지(一切種智)이다. 자연히 부사의(不思議)한 업(業)이 있어 능히 시방에 나타나서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묻는다] 허공이 갓이 없는 까닭으로 세계가 갓이 없는 것이요. 세계가 갓이 없는 까닭으로 중생이 갓이 없는 것이요. 중생이 갓이 없는 까닭으로 심행(心行)의 차별도 또한 다시 갓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계는 가히 분제(分齊)할 수 없기에 알기가 어려우나 만약 무명(無明)을 끊으면 심상(心想)이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능히 알았기에 이름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는가?

[답한다] 일체경계(一切境界)가 본래 한 마음인지라 상념(想念)을 여의었건만 중생들이 망령되이 경계를 보는 까닭으로 마음에 분제(分齊)가 있는 것이요 망령되이 상념(想念)을 일으켜서 법성(法性)에 칭합(稱合)하지 못한 까닭으로 능히 알지 못한다. 모든 부처님은 견상(見相)을 여의어서 두루하지 아니한 곳이 없으시니 마음이 진실한 까닭이며, 곧 이것이 모든 법의 자성(自性)이다. 자체(自體)가 일체의 망법(妄法)을 드러내 비추어 크나큰 지혜의 작용이 있어서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이 응하여 아는 것을 따라서 다 능히 갖가지의 법의를 열어 보인 것이니 이런 연고로 이름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한다.

[또 묻는다] 만약 모든 부처님이 자연의 업이 있어서 능히 일체처(一切處)에 나타나 중생을 이익(利益)되게 할 것인데 일체 중생이 혹 그 몸을 보거나 혹 신변(神變)을 보거나 혹 그 말씀을 들으면 이익을 얻지 못한 것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세간에는 능히 보지 못한 것이 많은가?

[답한다] 모든 부처님은 법신(法身)이 평등하시어 일체처(一切處)에 두루하지만 뜻을 짓지 않는 연고로 자연이라 말한다. 다만 중생의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난 것이니 중생의 마음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에 만약 때가 있으면 색상(色相)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중생도 마음에 만약 때가 있으면 법신(法身)이 나타나지 않는 까닭이다.

제4장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1. 총설(總說)


이미 해석분(解釋分)을 설하고 다음에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설할 것이다. 이 가운데 정정취(正定聚)에 들지 못한 중생을 의지하는 까닭으로 수행신심(修行信心)을 설한 것이다.

2. 사신(四信)

어떤 것이 신심(信心)이며, 어떤 것이 수행(修行)인가? 간략히 설하면 신심(信心)에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넷이라 하는가? 첫째는 근본(根本)을 믿는 것이니 이른바 즐거이 진여(眞如)의 법(法)을 생각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부처님에게 무량한 공덕이 있는 것을 믿는 것이니 항상 친근(親近)해서 공양(供養)하고 공경(恭敬)할 것을 생각하며, 선근(善根)을 일으켜서 일체지(一切智) 구하기를 원하는 까닭이요, 셋째는 법(法)에 큰 이익이 있는 것을 믿는 것이니 항상 모든 바라밀수행(波羅蜜修行)하기를 생각하는 까닭이요, 넷째는 승(僧)이 능히 올바로 수행(修行)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하는 것을 믿는 것이니 항상 즐거이 모든 보살대중을 친근(親近)해서 여실(如實)한 행을 배우기를 구하는 까닭이다.

3. 수행(修行)의 오문(五門)

수행(修行)에 다섯 가지 문이 있어서 능히 이 신(信)을 이루는 것이니 어떤 것이 다섯인가? 첫째는 보시문(布施門)이요, 둘째는 지계문(持戒門)이요, 셋째는 인욕문(忍辱門)이요, 넷째는 정진문(精進門)이요, 다섯째는 지관문(止觀門)이다.

1) 제1 시문(施門)

어떻게 보시문(布施門)을 수행하는가? 만약 일체중생이 와서 구하여 찾는 자를 보면 소유한 재물을 힘을 따라서 베풀어주어 자기의 아끼고 탐하는 것을 버리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기쁘게 하며, 만약 액난(厄難)과 공포(恐怖)와 위험스러운 핍박(逼迫)을 보면 자기의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따라 무외(無畏)를 베풀어주며, 만약 어떤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면 자기가 능히 아는 것을 따라 방편으로 설하지만 응당 명리(名利)와 공경(恭敬)을 탐하여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만을 생각하여 보리(菩提)에 회향(回向)하기 까닭이다. 2) 제2 계문(戒門)
어떻게 계문(戒門)을 수행하는가? 이른바 살생도 아니하고, 도둑질도 아니하며, 음행도 아니하고, 양설(兩舌)도 아니하며, 나쁜 말도 아니하고, 거짓말도 아니하며, 꾸미는 말도 아니하고, 탐심(貪心)·질투(嫉妬)·사기(詐欺)·아첨(阿諂)·왜곡(歪曲)·진에(瞋 )·사견(邪見)을 멀리 여위는 것이다. 만약 출가(出家)한 자라면 번뇌를 절복(折伏)하기 위한 연고로 또한 응당 시끄러운 곳을 멀리 여의고 항상 고요한 데 머물러 욕심(慾心)이 없고 만족할 줄 아는 두타(頭陀) 등의 수행을 수습(修習)하며, 나아가 적은 허물이라도 마음에 두려움을 내어서 부끄러워하여 뉘우쳐 고치고 여래께서 제정하신 금계(禁戒)를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며, 마땅히 기롱(譏弄)과 혐의(嫌疑)를 막아 두호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망령되이 죄과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까닭이다.

3) 제3 인문(忍門) 어떻게 인문(忍門)을 수행하는가? 이른바 다른 사람이 괴롭게 함을 응당히 참아서 마음에 보 갚음을 품지 아니하며, 또한 마땅히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훼방하거나, 기리거나, 칭찬하거나, 희롱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즐겁게 하는 등 법을 참는 까닭이다. 4) 제4 진문(進門)

어떻게 진문(進門)을 수행하는가? 이른바 모든 착한 일에 마음이 게으르지 아니해서 뜻을 세워서 굳고 강하게 하여 비겁하고 나약함을 멀리 여의며 마땅히 과거 오래고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으로 큰 괴로움을 받아 이익이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 이런 까닭으로 마땅히 모든 공덕(功德)을 부지런히 닦아서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여 속히 여러 가지 괴로움을 여위는 것이다.

다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하나 과거 세상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허다한 무거운 죄악(罪惡)과 업장(業障)이 있는 까닭으로 사마(邪魔)와 모든 귀신(鬼神)의 뇌란(惱亂)한 바가 되며, 혹은 세간의 사무에 갖가지로 얽매이게 되며, 혹은 병고(病苦)에 시달리는 바가 되어 이와 같은 등 많은 장애(障碍)가 있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응당히 용맹(勇猛)하게 정근(精勤)하길 밤낮으로 육시(六時, 하루종일)에 모든 부처님께 예배(禮拜)해서 성심(誠心)으로 참회(懺悔)하며, 권청(勸請)하고 따라 기뻐해서 보리(菩提)에 회향(回向)하길 항상 쉬지 아니해서 모든 장애(障碍)를 면하여 선근(善根)이 증장(增長)함을 얻는 까닭이다.

5) 제5 지관문(止觀門)-사마타의 방편을 닦음

어떻게 지관문(止觀門)을 수행하는가? 말한바 지(止, 사마타)라 것은 이른바 일체의 경계상(境界相)을 그치는 것이다. 사마타관(奢摩他觀)의 의미를 수순(隨順)하는 연고요. 말한바 관(觀, 위빠사나)이라는 것은 이른바 인연생멸의상(因緣生滅相)을 분별하는 것이다. 비발사나관(毘鉢舍那觀)의 의미를 수순(隨順)하는 연고이다. 어떻게 수순(隨順)하는가? 이 두 가지 뜻으로써 점점 수습하여 서로 버리지 않으면 지(止)와 관(觀)이 쌍으로 앞에 나타나는 연고이다.

만약 지(止)를 닦는 자라면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서 뜻을 바로 하고 기식(氣息, 호흡)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형색(形色)에 의지하지 않고, 공(空)에도 의지하지 아니하며, 지(地)·수(水)·화(火)·풍(風)에도 의지하지 아니 하며, 나아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에도 의지하지 아니해서 일체의 모든 생각을 염(念)을 따라 다 제거하는 것이요, 또한 제거하였다는 생각까지도 보내는 것이다. 일체법(一切法)이 본래 생각이 없는 것이라 생각 생각을 나지도 않고 생각 생각이 소멸하지도 않는다.

또한 마음이 밖으로 경계를 생각함에 따른 뒤에 마음으로써 마음을 제거한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만약 산란하거든 곧 마땅히 거두어 들여 바른 생각에 머물러야 한다. 이 바른 생각이란 것은 마땅히 알라 오직 마음 뿐이요. 바깥 경계가 없는 것이다. 곧 다시 이 마음이 또한 자체의 모양이 없어서 생각 생각에 가히 얻지 못할 것이다. 만약 앉고 일어남을 쫓아가고, 오고, 나아가고, 그침과 시작하는 것이 있는 일체의 때에 항상 방편(方便)을 생각하여 수순(隨順)하고 관찰해서 오래 익혀 순숙(淳熟)하면 그 마음이 머물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머무는 까닭으로 점점 맹리(猛利)해져서 수순(隨順)하여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갈 수 있어서 깊이 번뇌가 조복(調伏)되고 신심이 증장(增長)해서 속히 불퇴전(不退轉)을 이룰 것이다. 오직 의혹(疑惑)과 불신(不信)과 비방(誹謗)과 중죄업장(重罪業障)과 아만(我慢)과 해태(懈怠)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 사람은 능히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 지(止)의 수승(殊勝)한 공능(功能)을 밝힘

다시 이 삼매(三昧)를 의지하는 까닭으로 곧 법계(法界)가 일상(一相)인줄 아는 것이다. 이른바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신(法身)이 중생의 몸과 더불어 평등(平等)하여 둘이 없는 것이니 곧 이름이 일행삼매(一行三昧)이다. 마땅히 알라 진여(眞如)는 이 삼매(三昧)의 근본(根本)이다. 만약 사람이 수행하면 점점 능히 무량한 삼매(三昧)를 낼 것이다. 혹 어떤 중생이 선근(善根)의 힘이 없으면 곧 모든 마군(魔軍)과 외도(外道)와 귀신의 혹란(惑亂)하는 바가 될 것이다. 혹 앉아 있는 가운데 형태(形態)를 나타내어 두렵게 하거나 혹은 단정한 남녀들의 모양을 나타내거든 마땅히 오직 마음인줄 염(念)하면 경계가 곧 멸해서 마침내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2) 마(摩)의 일을 밝힘

혹은 천상의 모습과 보살의 모습을 나타내며, 또한 여래(如來) 모습을 지어 상호(相好)가 구족(具足)하며, 혹은 다라니를 설하며, 혹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를 설하며, 혹은 평등하고 공(空)해서 모양도 없고, 원(願)도 없고, 원(怨, 원망)도 없고, 친(親)함도 없고, 인(因)도 없고, 과(果)도 없어서 필경(畢竟)에 공적(空寂)한 것이 이것이 참다운 열반(涅槃)이라 설한다.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숙명과거(宿命過去)의 일을 알게 하며, 또한 미래의 일을 알게 해서 타심지(他心智)를 얻어 변재(辯才)가 거리낌이 없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세간명리(世間名利)의 일을 탐착(貪着)케 한다. 또 사람으로 하여금 자주 화를 내고 자주 기뻐해서 성품(性品)이 항상 되고 기준(基準)이 없게 한다. 혹은 자애(慈愛)가 많게 하며, 졸음도 많고 질병(疾病)도 많아서 그 마음을 해태(懈怠)하게 한다. 혹은 마침내 정진할 생각을 일으켰다가 뒤에 문득 휴폐(休廢)하고 믿지 않는 마음을 내어서 의심(疑心)이 많고 생각이 많아지게 한다. 혹은 본래 수승한 행을 버리고 다시 잡된 업을 닦게 한다. 혹은 세간의 일에 집착해서 갖가지로 얽매이게 한다. 또한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삼매를 얻어 조금이라도 서로 비슷하게 한다. 다 이것은 외도가 얻는 것이라 참다운 삼매(三昧)가 아니다.

혹은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혹 하루나 혹 이틀, 혹 사흘로 이에 칠일에 이르고 선정(禪定) 중에 머물러 자연히 향기롭고 아름다운 음식(飮食)을 얻어먹고 몸과 마음이 쾌적(快適)하고 기뻐서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애착(愛着)하게 한다.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음식에 분제(分齊)가 없어 졸지에 많이도 하고 적게도 하여 안색이 달라지게 한다. 이 뜻을 쓰는 까닭으로 수행하는 자가 항상 응당 지혜로 관찰해서 이 마음으로 하여금 삿되나 그물에 떨어지게 하지 말고 마땅히 부지런히 생각을 바르게 하여 취하지 아니하고 착하지 아니하면 곧 능히 이 모든 업장(業障)을 멀리 여의게 될 것이다.

(3) 간략히 거짓과 참과 다른 것을 밝힘

마땅히 알라. 외도에게 있는 삼매(三昧)는 다 경애(見愛)와 아만(我慢)의 마음을 여의지 아니한 것이니 세간의 명리와 공경을 탐착(貪着)한 연고이다. 진여삼매(眞如三昧)란 것은 견상(見相)에 머물지 아니하며, 득상(得相)에 머물지 아니하며, 내지 선정(禪定)에서 나옴에도 또한 해이(解弛)하거나 태만함이 없어서 존재하는 번뇌가 점점 미세하고 엷어진다. 만약 모든 범부가 이 삼매의 법을 익히지 않고 여래의 종성(種性)에 얻어들어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세간의 모는 선정(禪定)의 삼매(三昧)를 닦되 흔히 선미(禪味) 집착(執着)을 일으켜서 아견(我見)에 의지하여 삼계(三界)에 계박(繫縛)되어 소속(所屬)되면 외도와 더불어 같다. 만약 선지식(善知識)의 두호하는 것을 여의면 곧 외도의 소견을 일으키는 까닭이다.


5) 이익을 보여 수행을 권장함


다시 정근(精勤)해서 전심(專心)으로 이 삼매를 수학(修學)하는 자는 현세에 마땅히 열 가지 이익을 얻게 되는데 어떠한 것이 열 가지가 되는가? 첫째는 항상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호념(護念)하는 것이 될 것이요. 둘째는 모든 마군(魔軍)과 악귀(惡鬼)에 능히 두려워하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요. 셋째는 구십오종(九十五種)의 외도(外道)와 귀신(鬼神)의 혹란(惑亂)하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요. 넷째는 심히 깊은 법을 비방(誹謗)하는 것을 멀리 여의어서 중죄(重罪)와 업장(業障)이 점점 미약하고 엷어지는 것이요. 다섯째는 일체의 의혹(疑惑)과 모든 나쁜 각관[覺觀, 즉 심사(尋伺)하는 분별심(分別心)]을 멸할 것이요. 여섯째는 모든 여래의 경계에 믿음이 증장(增長)함을 얻는 것이요. 일곱째는 근심 걱정을 멀리 여의어서 생사 가운데에서도 용맹스러워서 겁내지 않을 것이요. 여덟째는 그 마음이 유화(柔和)하여 교만(驕慢)함을 버려서 타인의 괴롭게 하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요. 아홉째는 비록 선정의 힘은 얻지 못하였으나 일체의 때와 일체경계의 곳곳에서 곧 능히 번뇌를 감손(減損)하여 세간사(世間事)를 즐기지 않을 것이요. 열째는 만약 삼매(三昧)를 얻으면 외연(外緣)의 일체음성에 놀라 움직이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6) 관(觀)의 네 가지-법상관(法相觀)·대비관(大悲觀)·대원관(大願觀)·정진관(精進觀)

다시 어떤 사람이 오직 지(止)만 닦는 다면 마음이 가라앉게 될 것이며, 혹 해태(懈怠)함을 일으켜 모든 선(善)을 즐기지 않고 대비(大悲)를 멀리 여의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관(觀)을 닦는 것이다.

(1) 법상관(法相觀)

관(觀)을 수습(修習)하는 자는 마땅히 일체세간의 유위법(有爲法)이 오래 머무는 것이 없어서 수유(須臾, 잠깐)에 변괴(變壞)하며 일체의 심행(心行)이 생각 생각에 생멸한다. 이런 까닭으로 고(苦)인줄 관(觀)하는 것이다. 응당히 과거에 생각한 것이 모든 법이 황홀(恍惚)하여 꿈과 같은 줄 관(觀)하며, 응당히 현재에 생각한 것이 모든 법이 마치 번갯불과 같은 줄 관하며, 응당히 미래의 생각하는 것의 모든 법이 마치 뜬구름과 같아서 홀연히 일어나는 줄 관하며, 응당히 세간의 일체 유신(有身)이 다 부정(不淨)하여 갖가지로 더러운지라 하나도 가히 즐거움이 없는 줄 관(觀)하는 것이다.

(2) 대비관(大悲觀)·대원관(大願觀)·정진관(精進觀)

이와 같이 마땅히 생각하라. 일체의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옴으로 다 무명(無明)의 훈습(熏習)한 것을 인(因)한 까닭으로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生滅)하게 해서 이미 일체 신심(信心)에 큰 괴로움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逼迫)이 있으며, 미래에 괴로운 바도 또한 분제(分齊)가 없어서 버리기도 어렵고 여의기도 어려워서 깨달아 알지 못할 것이니 중생도 이와 같아서 심히 가히 불쌍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을 지어서 곧 응당히 용맹하게 큰 서원(誓願)을 세우되 원컨대 내 마음이 하여금 분별(分別)을 여읜 연고로 시방(十方)에 두루해서 일체의 모든 선공덕(善功德)을 수행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하며, 한량없는 방편(方便)으로써 일체의 고뇌(苦惱)하는 중생(衆生)을 빼어내고자 해서 하여금 열반(涅槃)의 제일의(第一義)의 즐거움을 얻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원을 일으키는 연고로 일체 때와 일체 곳에 있는 바 뭇 선을 몸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따라서 수학(修學)하는 것을 버리지 아니해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다. 오직 앉아 있을 때 지(止)에 전념(前念)할 적이는 제외한다. 혹 나머지 일체에는 다 마땅히 할 것과 하지 못할 것을 관찰(觀察)하는 것이다.

7) 지관쌍운(止觀雙運)을 밝힘

혹 가거나, 혹 머물거나, 혹 눕거나, 혹 일어남에 다 응당히 지(止)와 관(觀)을 함께 수행한다. 이른바 비록 모든 법(法)의 자성(自性)이 나는 것이 아닌 줄 생각하나 다시 곧 인연(因緣)이 화합한 선악(仙樂)의 업과 고락(苦樂) 등의 과보(果報)가 잃어지지도 아니하고, 무너지지도 아니 하며, 비록 인연선악(因緣善惡)의 업보(業報)를 생각하나 또한 곧 성(性)을 가히 얻지 못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저 지(止)를 닦는 자는 범부가 세간에 머물러 집착하는 것을 대치(對治)하며, 능히 이승(二乘)의 겁약(怯弱)한 견해를 버리는 것이요, 저 관을 닦는 자는 이승의 대비심(大悲心)을 일으키지 않고 좁고 비열한 마음의 허물을 대치하는 것이요, 범부가 선근(善根)을 닦지 않는 것을 멀리 여윈다. 이 뜻을 쓰는 까닭으로 이 지(止)와 관(觀)의 문(門)이 한가지로 서로 도와 이루어서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아니 한다. 만약 지(止)와 관(觀)을 갖추지 못하면 곧 능히 보리(菩提)의 도(道)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8) 물러남이 없는 방편(方便)과 염불왕생(念佛往生)을 밝힘

다시 다음에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서 정신(正信)을 구하고자 하나 그 마음이 겁약(怯弱)한 이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머물러서 스스로 능히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친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두려워하여 이른바 신심(信心)을 가히 성취하기 어렵다 해서 뜻으로 물러가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알라 여래께서 수승한 방편을 두어서 신심을 섭호(攝護)한 것이다. 이른바 뜻을 오로지 하여 부처님을 염(念)하는 인연(因緣)으로 원을 따라 타방(他方)의 불토(佛土)에 태어나서 항상 부처님을 친견해서 길이 악도를 여읠 것이다. 저 수다라(修多羅)에 설하시길, "만약 사람이 오로지 [서방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생각해서 닦은 선근(善根)을 회향하여 저 세계에 나기를 구원하면 곧 왕생함을 얻는다"고 하셨다.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는 까닭으로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며, 만약 저 부처님의 진여(眞如)인 법신(法身)을 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하면 필경(畢竟)에 태어남을 얻어서 정정(正定)에 머무는 까닭이다.

제5장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이익이 있다고 수행을 권장함

1. 바른 믿음을 권장함


이미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설하였다. 다음은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을 설할 것이다. 이와 같이 마하연(摩訶衍)인 모든 부처님의 비장(秘藏)을 내가 이미 다 설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심히 깊은 경계에 바른 마음을 내서 비방(誹謗)을 멀리 여의고 대승(大乘)의 도(道)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논(論)을 가져서 사량(思量)하고 수습(修習)하면 구경에 능히 무상(無上)의 도(道)에 이를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 법을 들어 마치고 겁약(怯弱)한 마음을 내지 아니 하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결정코 부처님의 종자(種子)를 이어서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수기(授記)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가사 어떤 사람이 능히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해서 하여금 십선(十善)을 수행하게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한 식경(食頃)이라도 바로 이 법을 생각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앞의 공덕보다 초과해서 가히 비유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다음에 어떤 사람이 이 논(論)을 수지(受持)해서 관찰하고 수행하되 만약 하루나 하룻밤이라도 소유한 공덕이 무량무변해서 가히 설하지 못할 것이다. 가령 시방(十方)의 일체 모든 부처님이 각각 무량무변한 아승지겁에 그 공덕을 찬탄하여도 또한 능히 다하지 못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법성(法性)의 공덕이 다함이 없는 연고로 이 사람의 공덕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끝이 없을 것이다.

2. 멀리 비방함을 여의어라


그 어떤 중생이 이 논(論) 가운데에 훼방(毁謗)하여 믿지 아니하면 얻는 죄의 과보(果報)는 무량한 겁(劫)을 지나도록 큰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이런 연고로 중생은 다만 마땅히 우러러 믿을지언정 마땅히 훼방(毁謗)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를 해지는 것이 깊음으로써 또한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해서 일체 삼보(三寶)의 종자(種子)를 끊는 것이다. 일체여래가 다 이 법을 의지하시어 열반을 얻은 까닭이며, 일체보살이 이것을 인하여 수행해서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는 연고이다. 마땅히 알라 과거의 보살이 이미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루었으며, 현재의 보살이 이제 이 법(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루었으며, 미래의 보살도 마땅히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룰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중생이 응당 부지런히 닦아 배워야 한다.

제3 유통분(流通分)-회향송(回向頌)

모든 부처님의 심히 깊고 광대한 뜻을
내 이제 수순(隨順)하여 다 가져 설하였으니
이 공덕이 법성(法性)과 같음을 회향(回向)해서
널리 일체의 중생계(衆生界)를 이롭게 하였다.

대승기신론종(大乘起信論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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