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좌선의 방법
시간
좌선시간은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야겠지만 보통 잠자기 전 한 시간이 좋습니다. 한 시간이 힘들면 30분부터 시작하여 차츰 익숙해지면 1시간으로 늘여야 합니다. 한 시간은 앉아야 좌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옷은 헐렁한 것이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잠옷도 괜찮습니다. 미리 자리를 깔아놓고 요 위에서 좌선을 하다가 그대로 누워 잠을 자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피곤해진 다리는 잠을 쉽게 오게 할 것입니다. 잠잘 때에는 눈을 감고 화두를 꼭 붙잡아 둡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30분 정도 좌선을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습니다. 좌선은 일주일에 5일은 해야 진전이 있습니다. 술을 마신 날에는 좌선을 생각하지 말고 아예 일찍 자는 편이 낫습니다.
장소
좌선을 따로 시간을 내어 하는 경우, 차실(茶室)이나 선실(禪室)이 있으면 좋으나 대부분의 집에는 그런 방이 없을 것입니다. 그냥 자기가 자는 방에서 하든지 거실에서 하면 됩니다. 이 때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으면 좋지 않습니다. 자기 방이라면 문을 잠그고 방문에 <정진중>이라는 종이를 붙여 두기 바랍니다. 물론 다른 가족에게 정진시간을 미리 일러두어 협조를 구해야겠지요. 거실에서 하려면 다른 가족에게 불편하지 않도록 시간을 잘 조절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이 모여 같이 한다면 아주 좋겠지요.
정진에 방해를 받지 않으려면 전화코드는 빼두기 바랍니다. 좌복(坐服-방석)은 앉았을 때 사방으로 5cm 이상 여유가 있는 두툼하고 큼지막한 것이 좋습니다. 좌선 전용으로 하나 만들어 사용한다면 기분도 의젓해질 것입니다.
조명은 40와트 백열구에 갓을 씌운 스탠드가 적당합니다. 형광등은 눈을 자극하기 때문에 좋지 않습니다. 너무 밝거나 어둡지 않아야 합니다. 여의치 않으면 책상 위에 촛불을 하나 켜두고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안경을 비롯하여 몸에 붙어 있는 모든 장신구를 떼어 내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세
좌선은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원칙으로 합니다. 먼저 두 다리를 쭉 편 후 오른쪽 발을 두 손으로 잡아 왼쪽 허벅지 위에 바짝 올립니다. 그리고 왼쪽 발을 잡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립니다. 이것을 항마좌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오른 쪽 발목이 끊어질 듯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에 10분씩 몇 주만 계속하면 차츰 다리가 적응하여 고통이 줄어들 것입니다.
허벅지가 굵어서 잘 안 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도 앞에서 말한 대로 식탐을 하지 않고 순수성음식 위주로 먹으며 정진을 계속하면 쓸데없는 허벅지의 지방질이 사라질 것입니다. 따로 다이어트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자기 마음을 챙기면 자동으로 다이어트가 되는 것입니다. 근본을 챙기지 않고 표면적인 현상에 치중하는 다이어트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발목이 아프면 10분씩 반대방향으로 다리를 바꾸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왼발을 먼저 올리고 오른발을 나중에 올리는 좌법은 길상좌(吉祥坐)라고 합니다. 모든 부처님의 앉은 모습입니다.
가부좌는 도저히 힘들어서 안되겠다는 사람은 우선 반가부좌부터 시작하기 바랍니다. 반가부좌는 다만 왼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놓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발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좌법은 일시적인 방편입니다. 나중에는 반드시 금강과 같이 견고한 결가부좌로 돌아와야 합니다.
다리의 모양을 마쳤으면 오른 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발목 봉숭아뼈 위에 놓고, 왼손을 바른 손바닥 위에 겹친 후 양쪽 엄지손가락 끝을 맞대어 둥근 모양을 만듭니다. 이 수인(手印)을 대삼마야인(大三摩耶印) 또는 법계정인(法界定印)이라고 합니다. 이 수인을 하면 자연스럽게 팔꿈치와 옆구리 사이는 자기의 주먹 하나가 들락거릴 정도의 틈이 생깁니다. 손을 무릎 위에 올리면 앞이 허해져서 집중이 되지 않으니 혹시 그렇게 길을 들인 사람은 지금부터 바꾸기 바랍니다.
다음에 몸을 서서히 바로 일으키며 허리를 반듯하게 폅니다. 이때 몸을 전후좌우로 움직여 탑의 기단처럼 하체를 고정하고 허리를 탑신처럼 세웁니다. 너무 꼿꼿하게 세우거나 굽히면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것이 좋습니다.
귀는 어깨와 나란하게 하고 코는 배꼽과 수직이 되도록 합니다. 턱은 약간 당기고 입은 가볍게 다문 후 혀는 위로 살짝 구부려 입천장 부근에 가볍게 댑니다. 혀를 바짝 말아 입천장 안쪽에 대면 혀에 힘이 들어가 정진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좌선의 요령은 몸을 반듯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좌(正坐)라고 합니다. 몸의 어느 부분이든지 힘이 들어가면 안됩니다.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면 익숙할 때까지는 다리가 쉬 아픕니다. 그럴 때는 다리를 바꿔가며 앉도록 하되 바꾸는 것이 습(習)이 되지 않도록 오래 버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다리나 어깨가 아파 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좌선이 몸에 익을 동안 일시적으로 생기는 현상입니다.
눈은 감지 않아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뜨고 2m 전방에 시선을 '던져'둡니다. 억지로 깜박거리는 눈을 참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눈을 깜박이더라도 천천히 깜박거려야 합니다. 눈을 감으면 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좌선이 아니라 혼침입니다. 자신이 느끼기엔 정신이 말짱한 것 같지만 순간순간 혼침이 지나가고 있으며 다만 그 순간이 짧기 때문에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조사(祖師) 스님네들은 눈감고 참선하면 바로 흑산귀굴(黑山鬼窟)에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다리가 아파 잠이 올 생각도 않지만 차츰 자세가 잡히면 망상이 휘젓고 다니다가 그것이 시들해지면 잠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30분 좌선을 하기로 했다면,〈10분좌선-5분휴식-15분좌선〉으로 하고 1시간이라면 이것을 두 번 반복하면 됩니다. 좌선에 익숙한 사람은〈25분좌선-5분휴식-30분좌선〉으로 하면 됩니다. 나중에〈50분 좌선-10분 휴식〉이 된다면 좌선의 자세가 제대로 잡힌 것으로 보아도 좋습니다. 또한 휴식시간도 좌선의 연장이므로 말을 하거나 다른 일에 정신을 팔지 않아야 합니다. 조용히 아픈 다리를 어루만지든지 일어나 좌복 주위를 천천히 돌며 계속 화두를 놓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혼자 좌선하더라도 죽비를 치는 것이 좋습니다. 죽비는 불교용품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처음 입선(入禪) 죽비는 세 번 칩니다. 중간 휴식 시간에 한번 칩니다. 휴식이 끝나면 다시 한번을 치고 정진 한 후 좌선을 마치면 방선(放禪)죽비로 세 번 칩니다. 형식적인 모양 같지만 형식이 내용을 이끌어 줄 때도 많습니다.
호흡
호흡은 처음에 세 번 깊게 들이마시고 내쉽니다. 이 때는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쉽니다. 몸의 탁한 기운을 다 빼낸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리고 입을 다뭅니다. 이제부터는 코로만 호흡을 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혀야 호흡도 가라앉습니다. 술을 마시거나 희노애락에 마음이 쏠려 기분이 들떠 있거나 가라앉아 있으면 호흡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들뜬 마음을 호흡으로 가라앉히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이미 마음이 떠 버렸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마음을 평정(平靜)하게 유지하는 역류공부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역류공부가 잘 되어야 좌선시 선정에 힘이 붙고, 선정의 힘은 또한 역류공부의 밑거름이 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내내 처음의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처음 자세를 잡고 화두참구에 들어가기 전 호흡조절을 위해 위빠사나 수행법을 응용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위빠싸나(Vipassana) 수행법은 한 마디로 〈관찰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화두선 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가진 남방 불교국가의 수행법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에서 좌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의 들숨과 날숨을 관찰합니다. 화두선을 하더라도 처음 입정(入定)에 들어가 호흡을 고를 때와 중간에 망상이 치성할 때 응용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거해스님이 엮은 『깨달음의 길-근본불교 명상관찰 수행법(1990, 도서출판 山房』에 있는 호흡에 관한 내용(pp.23-26) 중에서 이미 언급한 좌선의 자세 같은 중복되는 부분은 빼고 옮겨 보겠습니다. 좌선시 눈을 감는 것 외에는 위빠싸나 역시 좌선의 자세는 화두선과 거의 같습니다.
「숨을 들이쉴 때 아랫배가 일어남을 정신적으로 이름하여 '일어남'이라 하고 숨을 내쉴 때 아랫배가 꺼지는 현상을 '사라짐'이라 하여 이후부터 통칭하여 일어남·사라짐이라 한다. 수행인은 마음집중 수행을 위하여, 고요히 앉아서 자신의 아랫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여 매우 예리하고 정확하게 밀착된 상태에서 자세히 관찰하고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앉은 상태에서 자신의 호흡이 코끝을 스쳐 들어감에서부터 아랫배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보는 듯 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만의 현상에 마음을 집중시켜 자신의 아랫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즉 움직이는 모습을 자세히 느끼고 예리하게 관찰한다.
호흡은 아주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쉴 때 들이쉰 숨이 아랫배까지 미치도록 하여 팽창됨을 피부로 느끼도록 하고 정신적으로 '일어남'이라고 읽어야 하며, 동시에 감은 눈은 자신의 아랫배에 팽창된 부분을 실지로 보는 듯하여 동작이 동시에 일어나도록 해서, 관찰이 하나의 집중력이 되도록 한다.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은 아주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절대로 어떤 규칙을 정하여 의식적으로 길게 내쉬고 짧게 들이쉬거나, 짧게 내쉬고 길게 들이쉬거나 하지 말고 다만 자연스러운 호흡이 되어야 한다.
호흡이 매우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은, 만약에 호흡에다 어떠한 규칙을 정하거나 인위적인 것이 되면 쉽게 피곤해지고 상기(上氣, 더운 기운이 머리까지 뻗치는 현상으로 머리가 무겁고 아픔)가 올라오며, 여러 가지 다른 좋지 않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러운 호흡을 하면서 다만 정신적으로 아랫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을 관찰 집중하는 것이다. 이 수행법에 대해서 어떠한 이름을 붙여도 관계없으며, 다만 바르고 자세하며 정확하게 자신의 아랫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여 일념집중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반드시 3단계로 구분되어진다. 숨을 들이쉴 때는 바람이 코끝을 스치어 들어가는 부분은 처음이요, 가슴을 스쳐 지날 때가 중간이요, 아랫배에 와 닿음이 끝맺음이다. 그리고 내쉴 때는 아랫배의 꺼짐이 시작이요, 가슴을 스칠 때가 중간이며, 코끝을 스쳐 나오는 것이 끝맺음이다.
처음 시작하는 이는, 다만 중간부분만 인식하게 되고 앞쪽의 끝남과 시작부분이 분명치 못하게 되나, 계속적인 노력으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게 되면, 처음에서 끝나는 부분까지 분명해지며, 아랫배의 일어남과 마음의 관찰이 동시에 행해지는 것이다.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방법이어야 한다. 마치 돌을 던져 표적에 정확히 맞추듯이,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체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그 자연적 성품을 보는 것을〈가야누빠싸나[몸의 동작을 관찰하는 것]〉라고 하며 동시에〈우다야와빠싸나냐나 [모든 사물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보고 얻는 지혜]〉라고 한다. 우다야와야는 단순히 자신의 아랫배가 호흡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며, 몸의 가려움, 아픔, 다리의 저림, 벌레의 기어오름에 의한 피부의 스멀거림 등도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 어느 것도 지속적으로 오래가는 것이 없다.
오래도록 앉아 있음으로 인한 다리의 아픔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매우 빠른 속도이기 때문에 고통이 뭉쳐진 듯 아프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사실 자세히 관찰하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속도가 빠른 결과일 뿐이다. 이와 같이 모든 몸의 현상과 마음의 현상, 몸 밖의 자연적 현상일 뿐 아무 것도 견고하게 영원히 남아 있거나 머물지 않음을 자신의 아랫배의 현상을 통해 깨닫게 되는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다」
부언하여 설명하면 위빠싸나에서는 호흡을 들이쉴 때 '일어남·일어남·일어남' 이라고 속으로 염(念)하고 각각 코끝·가슴·아랫배를 관(觀)합니다. 또 내쉴 때에는 '사라짐·사라짐·사라짐·'이라고 염하고 거꾸로 아랫배·가슴·코끝을 관합니다.
일단 제대로 호흡이 조절되면 우리는 화두를 듭니다. 화두선이 위빠싸나와 묵조선(默照禪)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화두참구(話頭參究)
화두의 시작은 황벽희운(黃蘗希運, ?-850) 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황벽스님은 바로 백장스님의 법을 이은 스님입니다. 스님의 법은 임제(臨濟)스님이 이었으며 홍주자사(洪州刺史) 배휴(裵休)는 속가제자로 유명합니다.
화두란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공안이란 본래 관청의 「엄정한 문서」라는 의미입니다. 공부하는데 있어 올바르게 깨치는 데는 불조의 바른 이치를 바로 설하신 조사의 말씀이나 몸짓, 그 밖의 모든 방법은 그것이 모두 깨치는데 있어 바른 법령이 되는 것입니다. 『선관책진(禪關策進)』의 첫 페이지는 다음과 같은 황벽스님의 사자후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대중들아, 그대들이 만약 미리 칠통(漆桶)을 철저히 타파하여 놓지 않으면 납월 30일(죽는 날)을 당하여 정녕 열뇌(熱惱)하고 황란(惶亂)할 것이 분명 하느니라.
어떤 외도들은 수행자가 공부하는 것을 보고 '아직도 저러고 있나.' 하며 냉소하나 내 그들에게 묻노니, 홀연 죽음이 닥치면 너는 무엇으로 생사를 대적하겠느냐. 모름지기 평상시 힘을 얻어 놓아야 급할 때를 당하여 다소 힘을 덜 수 있는 것이니, 마땅히 목마르기를 기다려 샘을 파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
죽음이 임박하여서는 이미 수족이 미치지 못하나니 앞길이 막막하여 어지러이 갈팡질팡 하여 가히 괴롭고 괴로울 뿐이라. 평시에 다만 구두선(口頭禪)만 익혀서 선을 설하고 도를 말하며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여 제법 다해 마친 듯 하나 여기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용처가 없다. 평시에 남은 속여왔으나 어찌 이 때를 당하여 자신마저 속일 수 있으랴!
대중들아, 권하노니 신체가 강건한 동안에 이 일을 분명히 판단해 두라. 대개 이 문제는 풀기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목숨을 떼어놓고 힘써 공부하려고는 아니하고 다만 '어렵고 어렵다'고만 하니 만약 진정한 대장부라면 어찌 이와 같으랴.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조주스님이 '없다[無]'라고 답했다. 이 공안(公案)을 간(看)하되 하루 24시간 이 '무'자를 참구하여 밤이고 낮이고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누우나 옷 입으나 밥 먹으나 변소에 가나 생각생각 끊이지 아니하고 맹렬히 정신을 차려 저 '무'자를 지켜가라.
그리하여 날이 가고 해가 가서 공부가 타성일편(打成一片-화두가 순숙하여 끊이지 않아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어 항상 화두가 현전하는 경지)이 되면 어느덧 홀연히 마음 빛이 활짝 밝아 불조의 기틀을 깨달아 문득 천하 노화상의 혀끝에 속지 않고 스스로 큰 소리를 치게 될 것이다.
알고 보면 달마가 서쪽에서 왔다는 것도 바람이 없는데 파도를 일으킨 것이요,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신 것도 한바탕 허물이라. 여기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성인도 입을 떼지 못하거늘 하물며 어찌 염라노자(閻羅老子)를 말할까 보냐. 대중들아, 여기에 무슨 특별한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일이란 마음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느니라."
이 공안에는 1700가지의 공안이 있으나 모든 공안을 다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지식을 내려준 공안을 바꾸지 않고 꾸준히 참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공안으로는
<없다[無]>
<이 뭣고[是甚마]>
<뜰 앞에 잣나무[庭前柏樹子]>
<염불하는 놈은 누구인가[念佛者是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
등이 있습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는 화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 점이 남방의 위빠사나를 하는 사람들이나 묵조선을 하는 사람들이 화두선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점입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근기가 변했기 때문에 방편으로 화두가 생긴 것이고 아직도 여전히 유효한 마음공부법입니다. 허운(虛雲)스님은 『참선요지』에서 다음과 같이 자상하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당 송 이전의 선덕(禪德)들은 흔히 한마디의 말이나, 반 구절의 말로 도를 깨달았다. 스승과 제자간 사이에 전수하는 것도 마음으로써 마음에 인가하는데 지나지 않았을 뿐 어떠한 실제의 법은 없었다. 일상생활 가운데 묻고 대답하였고 또 방편에 따라 풀어 주고 속박하였으니 병을 보아서 약을 줄뿐이었다. 송대 이후 사람들은 근기가 약한 탓에 비유하여 「모든 것을 놓아라」,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일러주어도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모든 것을 놓지 못하고, 선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생각하였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조사스님들이 부득이 독으로써 독을 다스리는 방법을 채택하여 학인에게 공안(公案)을 참구하거나 화두(話頭)를 간(看)하라고 가르쳤다. 심지어 죽은 화두 하나를 정하여 깨물되 질겅질겅 깨물어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말라고 하였다. 마치 늙은 쥐가 나무 궤짝을 뚫는 것과 같이 하여 정해진 한 곳이 구멍날 때까지 파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한 생각으로써 만 생각을 물리치는 것이니 실로 부득이한 방법이다. 마치 몸에 있는 나쁜 독을 칼로 째서 치료하지 않으면 살아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물론 위의 법문은 출가자를 위한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화두를 하루 종일 든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진여자성을 찾아 삼계를 벗어나는 일은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동중공부를 지어나간다면 비록 금생에는 이루지 못할 지라도 다음 생에는 훨씬 나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날 기초를 닦는 일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불퇴전의 마음입니다.
경계해야 할 일
공부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탐심(貪心)과 진심(瞋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공부 정도를 판단하려면 그 사람의 탐심과 진심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애착과 집착에서 탐심이 생깁니다. 좋은 것을 가지고, 먹고, 입고 싶은 마음은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번뇌를 쌓이게 합니다. 그리고 비록 그 소망이 성취되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욕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일단 시작한 욕심에는 끝이 없습니다. 욕심의 근본 속성 때문입니다.
9백만원이 있는 사람은 백만원을 더 모아 천만원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천만원이 되면 이젠 2천만원을 모으고 싶어합니다. 5천만원이 되면 이젠 만족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10억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천만원 있을 때는 억대 부자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자신이 억대가 되다보니 점점 초라한 자신이 보이게 됩니다. 수십억대 이상의 재산가들이 어디 한 둘이어야 말이죠.
권력의 맛에 빠진 사람은 모두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합니다. 국회의원을 하다가 선거에 떨어진 사람은 다시 재기의 기회를 노립니다. 공천을 받기 위해서 당을 옮기기도 합니다. 권력과 명예의 달콤한 맛을 도저히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힌지 출가자 집단에서조차 틈만 나면 '장' 자리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난투극을 벌이는 판입니다. 그러나 한 생각 돌이키면 모두 부질없는 자리입니다.
공부가 조금이라도 된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보고 듣는 바깥경계에 끄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화를 잘 내는 사람을 보게 되면 '이 사람의 살림살이는 보잘 것 없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더구나 출가자가 진심(瞋心)을 많이 낸다면 보통사람 열 배의 악업을 짓는 셈입니다. 출가자는 시주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를 잘 내는 스님〉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큰스님이라고 이름이 알려졌다고 하더라도 속지 마십시오. 혹 방편으로 그런다고 둘러대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방편에 능할 정도로 공부가 되었다면 벌써 진심(瞋心)이 아닌 다른 방편을 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부가 익은 사람은 나라는 것이 본래 없으며 단지 4대가 화합한 일시적인 존재라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에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없으면 화가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화냈다는 말씀을 들어보셨습니까?
공부를 하려면 자기의 몸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몸은 마음의 그릇입니다. 몸이 없으면 마음도 없어집니다. 마음이 없으면 깨달음을 이룰 방법이 없습니다. 알고 보면 천상락 보다는 인간락이 더 낫습니다. 극락에 가면 살기가 너무 좋아 도를 닦으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세월은 잘 보내겠지만 결국 다시 인간세계로 내려와야 하니 시간을 낭비하는 셈입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을 위하여 "부디 왕생극락하시길 바랍니다." 라는 말보다는 "부디 더 좋은 몸을 받아 다시 돌아오세요." 라는 축원이 더 바람직합니다.
좋은 옷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이아 반지를 끼는 것이 몸을 보살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몸을 해치는 일입니다. 탐심 때문에 몸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곧잘 저지르는 잘못입니다. 무엇보다 몸에 병이 나지 않도록 잘 보살펴야 합니다. 과식과 과음 등으로 몸을 축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 욕심은 왜곡되고 잘못된 제7 말나식의 작용이라는 점을 항상 체크해야 합니다.〈소욕지족(少欲知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함을 안다〉라는 뜻입니다. 비싼 물건을 소유할수록 우리는 그 물건의 관리인으로 전락하기 십상입니다.
사진 찍는 사람이 제일 가지고 싶어하는 카메라 중의 하나가 독일제 라이카(LEICA) 카메라라고 합니다. 본체 값만 200만원이고 표준렌즈가 150만원이라고 하니 구입하는데 최소한 350만원은 주어야 합니다. 광각이나 줌렌즈를 추가로 구입하면 금방 500만원이 넘어갈 것입니다.
몇 년 저축한 돈으로 큰 맘 먹고 이 카메라를 구입했다면 처음에는 기분이 좋아 잠도 잘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본격적인 카메라 관리인으로 임명받은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훔쳐갈까 봐 꼭 꼭 숨겨둡니다. 무식한(?) 가족들로부터도 보호를 위해 열쇠를 채워둡니다. 렌즈에 습기가 차면 안되니 방습제를 철마다 갈아줍니다. 사진 찍으러 나가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에 찬 시선을 받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면 온 신경을 써 먼지를 닦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매일 사진을 찍어야 하는 직업적인 전문 사진가라면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나 취미로 찍는 아마추어라면 오늘 잃어버려도 아쉬움이 없는 정도의 카메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일년 중 몇 번이나 사진을 찍겠습니까. 물건이 사람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지 사람이 물건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깥 경치를 찍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찍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신의 주위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가장 아끼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오늘 갑자기 없어지더라도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책도 많이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40대 이후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30대까지는 부지런히 읽어야 하지만 40대부터는 부지런히 버려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책을 사 모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기에서 꼭 필요한 책은 사실 몇 권이면 족합니다. 집에 있는 책 중에 앞으로 다시 볼 책이 아닌데도 책장만 채우고 있는 책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뽑아서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기 바랍니다. 소유물은 무엇이든 간에 모일수록 애착이 커지게 마련입니다.
계율(戒律)은 아주 중요합니다. 도를 이루는데는 첫째가 지계(持戒)입니다. 계율은 곧 위없는 깨달음의 근본이며, 계율(戒律)로 인하여 선정(禪定)이 생기고, 선정으로 인하여 비로소 지혜(智慧)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계는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계율 자체에만 너무 집착하면 일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뗏목은 저 언덕으로 가는 〈도구〉일 뿐 뗏목 자체가 저 언덕은 아닙니다. 뗏목에 타고 있으면 일단 이 언덕을 벗어나기는 합니다. 그러나 저 언덕에 도착할 수는 없습니다.
저 언덕으로 가기 위해서는 노(櫓)를 저어야 합니다. 이 노야말로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도구입니다. 노를 가지고 강으로 가는 사람은 그냥 물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뗏목을 구해서 타고 갑니다.
노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즉, 공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뗏목(계율)을 구하기 마련입니다. 뗏목이 없으면 가지고 간 노가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조(六祖)스님께서 말씀하신 이른바 「마음이 곧은데 어찌 계율 지키는 일에 수고할 것이며, 행동이 바른데 어찌 참선이 필요하리요」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공부의 근본을 말한 것입니다. 잘못 오해하여 계율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계율은 중요하되 계율 자체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맺는 말
이 소식을 10대에 알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새로운 인간세상의 지식을 받아들이기에도 부족한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불교학생회에만 나가는 인연만 있다해도 수승한 근기입니다.
20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전6식이 제일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절이 이 때입니다. 공부도 하고 사랑도 하고 직장생활을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가치관이 비로소 정립되기 시작하는 시절이어서 아직 미숙합니다. 이런 소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인연만 있으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30대에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30대 초반이라면 직장생활과 결혼과 육아 때문에 바쁘겠지만 아이에게 미치는 부모의 영향을 생각할 때 30대 초반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30대 후반이라면 반드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40대라면 여유가 없습니다. 부지런히 힘을 써야합니다. 하루에 한 시간은 꼭 정좌(靜坐)를 해야 합니다. 정좌는 바로 되지 않습니다. 비록 실참(實參)을 많이 하지 않았더라도 30대부터 조금씩 공부를 한 경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분발을 하면 늦지는 않습니다. 40대 후반이라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50대라면 머리에 불을 끄듯이 서둘러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요행히 50년 동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지만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미 몸은 허물어지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각종 병이 생기고 체력은 떨어져 좌선이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체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부지런히 힘써야 합니다.
60대라면 상당히 늦었습니다. 대 분발심이 없는 한 지금까지 한평생 익힌 습에 의해 몸과 마음이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포기할 일은 아닙니다.
60세가 되면 지금까지 가족과 사회를 위해 하던 모든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시간으로 써야 합니다. 정년퇴직 후 무엇을 할 지 몰라 헤매는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산 것입니다. 이제부터 진짜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설사 70세까지 정년을 연장해 준다 하더라도 단호하게 거절하고 자신을 위한 공부에 나머지 시간을 써야 합니다. 공부는 스스로 하지 않으면 절대 진도가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70대라면 그냥 더 이상 악업을 짓지 말고 선업을 쌓으시라는 말만 하겠습니다.
열심히 정진하여 모두 함께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게 되길 기원합니다.